문학을 왜 읽어야 할까, 특히 소설을 왜. 이 질문에 많은 독서사랑단은 ‘문학을 읽는 것이야말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모두 나로 태어나 나로 죽는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볼 방법은 이번 생에는 없다. 회귀, 빙의, 환생 같은 것을 해볼 수 있다면 모를까, 나로 태어난 이상 다른 삶은 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고 ‘남의 삶 들여다보기’에 있어 문학 읽기만큼 적절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문학에 깊숙이 빠져들어 독서 이후에 우리가 가닿고 싶은 세계는 무엇일까. 뛰어난 글을 읽으면 그 글을 쓴 사람이 궁금해지고 궁극적으로는 글이 쓰고 싶어진다. 아니 에르노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작품들을 번역해온 신유진의 <나를 균열내기>는 독특한 구성을 한 산문집이다.
이 책은 자기 이야기이면서도 다른 작가들의 이야기다. 생활에서 겪은 자기의 경험이 아니라 번역가이자 애서가인 작가가 사랑했던 다른 작가들의 문학과 삶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취향이 자신의 계급에서 비롯했음을 성인이 되어 처음 인지하게 했던 아비투스. 아니 에르노는 식료품점 겸 카페를 운영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그의 주변은 공장노동자들이 다수였다. 서민계급이었던 그는 교육을 받아 부르주아 지식인 세계로 진입하지만 거기 들어서자 자신이 원래 속했던 세계와 새로운 세계가 하나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아니 에르노가 겪은 이 부조리함과 에두아르 루이가 오토픽션 <에디의 끝>에서 자신이 겪은 가부장의 폭력을 고발했던 것을 연결 지으며 저자는 오디세우스를 떠올린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왔을 때 왜 그는 바로 가족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대신 거지로 변장한 채, 자신이 떠나왔던 세계를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더 이상 그 세계의 내부자일 수 없기에, 낯선 눈으로 자신의 과거를 다시 바라본다. 그에게는 끊어진 시간과 흩어진 자아를 다시 잇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80쪽) 이처럼 작가들이 살아온 세상과 작가가 창조한 문학작품은 ‘나를 균열내기’라는 대전제 안에서 스스로를 파괴하고 파편화하며 다시 꿰어진다. 신유진, 아니 에르노, 에두아르 루이, 오디세우스는 하나의 챕터에서 다뤄지는데, 이들은 모두 자기를 파괴하고 또다시 나로 돌아가는 작업을 거친다.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거친 것처럼 작가는 결국 자신을 깨트려 거기서 문학을 창조하고 그 파괴 속에서 자신의 원형을 들여다보기를 반복한다.
삶의 의미를 성취에 둔다면 몸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실패로 이끌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통과하고 반드시 소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경험에 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통증이든 노화든 몸이 겪는 모든 것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해석해야 할 사건이 된다. /8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