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때문이지. 이태준이야 성북동에서 존경받던 유진데, 넉넉한 재산까지 두고 뭐하러 월북을 하겠어…. 고등학교 때 살던 삼선교집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 있던 책가게 아저씨는 이 책을 건네주면서 내게 그랬었다.
극심한 협심증 때문에 말이 너무 느리고 또 숨을 쉴 때마다 악취가 배어나오던 그 ‘소설가 이태준 친구’ 아저씨는 사전-참고서류의 책방 주인과는 다른 세월의 무게를, 다소 음울하게 풍기고 있어서 어린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월북’ 시인의 책 ‘실물’을 받아들었더니 덜컥 겁이 났다.
이 책을 내가 그때 읽기나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정지용 시작품을 ‘제대로’ 읽은 것은 시인이 되고 정지용 시집 원판을 제록스한 것들이 나돌던 82년 무렵쯤일 게다.
하지만 나는 책의 매력에 곧장 빠져들었다. 책장은 나달나달하고 활자는 엉성했지만 장정이 우아하고 돈없던 시절 종이가 귀하고 글이 귀하던,그래서 모든 것에 정성이 밴 책이란 시인이 될 생각이 전혀 없던 그때도 시간 자체를 아늑하고 소중하게 만드는 바 있었다.
그때 그 책방에서 까까머리 고등학생으로 소설가 이호철은 본 듯하다. 훗날 이호철한테 물어보니 그래 그런 책방이 있었던 듯하군, 하며 소년처럼 환하게 웃었었다.
어쨌거나, 이 책이 풍기는 시간의 향기에 매료되어 나는 청계천 고서점을 이잡듯 뒤지며 해방 전후 문학작품들을 한 200종 모았다. 그 책들 지금도 갖고 있다면 한 재산 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대학 4년 때 수배받는 몸이 되고 놀란 부모님이 다 태워버렸고, 다만 이 책 한권이 남았다. 아내는 시집올 때 정지용시집 <백록담>을 보탰는데 그건 2년 전 내한한 베트남 소설가 바오닌에게 선물로 주었다.
<정지용시집>에는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발렀’던 <바다2>,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리는 <琉璃窓1>, ‘눈섶까지 부풀어 오른 水平이 엿보’는 <海峽>, 그리고 만인의 명곡으로 애창되는 <鄕愁> 등 주옥같은 명시들이 망라되어 있다. ‘언어의 장인’이라는 명성답게 정지용 시는 이 당시 글자체와 한자, 그리고 띄어쓰기 그대로 읽어야 제맛이 나는 것 같다. 아, 고2 때 제대로 읽었더라면 내 시가 좀더 정갈해졌을 텐데. 스승을 알아뵙지 못하다니….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