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30주년을 맞이한 ‘자그레브애니메이션페스티벌’은 4대 애니메이션페스티벌(자그레브, 안시, 히로시마, 오타와)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랜 행사다. 하지만 예전 유고슬라비아라는 공산권 국가에서 개최된데다가 분리독립과정에서 벌어진 내전 등으로 인해 실제로 참가한 한국 사람은 거의 없다보니 ‘히로시마’나 ‘안시’에 비해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필자는 회사에서의 출장방침으로 운좋게 이 페스티벌을 참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유럽의 변방에 도착한 뒤 가장 큰 인상으로 다가온 것은 체제기간 중에 보았던 중세시대의 고풍스러우면서도 거대한 건축물이나 우아한 공원 같은 모습이 아닌, 오는 길에 탄 국적항공인 크로아티아항공기의 기내에서 상영된 <교수 발타자르>(Balthazar)라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세계 최대의 애니메이션 생산국 중 하나인 일본에서조차 항공기에서 상영된 자국애니메이션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 정도이고 디즈니와 같은 메이저의 작품도 항공여행 중에는 잘 보기 힘든 실정에서 이 5분가량의 짧은 애니메이션시리즈는 신선감을 주었다.

크로아티아 최대의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자그레브필름’에 의해 제작되어 꽤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이 시리즈물 중 항공기에서 상영된 3편은 특별히 새로 제작된 에피소드로 이 작품이 얼마나 많은 생각을 거쳐 만들어지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수작들이었다. 작달막한 교수 ‘발타자르’는 주인공이라기보다는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며 조언해주는 ‘이웃’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운동과 다이어트를 엄청 좋아하는 부인이 기르는 개가 등장하는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채소식사를 하며 집 주변에 그려진 트랙을 지나 온 동네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조깅해야만 하는 개의 모습에서는 어디에나 있는 부모에 잣대에 맞춰 살아가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나날이 심해져가는 자동차 매연을 견디다 못한 교수가 매연을 꽃향기로 바꾸는 필터를 개발해 도시의 공기를 정화시키지만 돈벌이에 급급한 사업가에게 설계도가 넘어간 뒤 그 필터를 더 많이 더 빨리 생산하기 위해 돌아가는 공장의 매연으로 인해 다시 공기가 오염되는 모습을 통해 현대 산업문명의 악순환적인 폐해를 비판하고 있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조그마한 소극장에서 광대 두명이 합쳐 키다리 피에로로 연기하는 친구가 어느 날 한 극장주의 눈에 들어 큰 극장에서 공연할 기회를 얻고 큰돈을 벌게 되나 가난한 시절 아무리 적은 음식이라도 서로 나눠먹던 두 사람이 작은 돈 한푼에 다툼을 벌이다 끝내 연기를 망치고 거리로 쫓겨난다는, 어디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인간의 탐욕을 단순명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간결한 그림체와 거의 대사없이 효과음만으로 표현되는 이 작품은 인류에 있어서 보편타당한 논리를 가장 간단하고도 알기 쉽게 표현해낼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매체 중 하나가 바로 애니메이션임을 알게 해주는 수작이다. 단순한 제품판매수단이나 시간 때우기용 오락물 정도로 여겨지는 일이 많은 현실 속에서 이러한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것은 그것에 대해 열정을 쏟아내는 크리에이터들과 그것을 인정하고 동감하며 봐주는 관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사람의 감각을 붙잡아놓고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들이 난무하는 영상물과 단순하지만 시공을 넘나들며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은 역시 뒷맛이 다르다. 비디오소프트에 대한 판매량이 지극히 저조한 한국에서 유일하게 잘 나가는 어린이 교육용 비디오의 대부분은 주입식 교육정보만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린이들에게 사람과 사회를 느끼게 할 수 있는 <발타자르>와 같은 작품이 아직까지 수입되지 못한 건 안타깝다.김세준/ 만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