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대부분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도네시아를 멈춰 세웠다. 바이러스 전파에 대한 공포로 봉쇄 조치가 내려지면서 극장을 비롯한 수많은 대면 사업장이 문을 닫았다. 이때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을 살아 숨 쉬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종류의 ‘공포’였다. 2022년 4월30일, 몇달간의 극장 폐쇄 끝에 아위 수리야디 감독의 <무용수 마을의 대학생 봉사활동>이 개봉하며 첫날에만 32만 관객을 동원했다. 초록 드레스를 입은 요부로 현신하는 뱀 악마 ‘바다라우히’를 내세운 아위 수리야디 감독의 영화는 밈과 리액션 영상을 통해 소셜미디어 전반에 폭발적인 대중 담론을 불러일으켰고, 두달 뒤 920만명을 끌어모으며 인도네시아 역대 최고 흥행작이 되었다.
이 영화가 세운 이정표는 인도네시아 영화산업 전반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었고, 이후 호러영화는 인도네시아 장르영화의 재정적 토대로 부상하며 팬데믹이 초래한 침체로부터 빠른 회복을 이끌었다. 2022년 인도네시아영화 87편 중 36편이 호러였고, 총 3320만명을 동원하며 전체 관객의 58%를 차지했다. 2023년엔 106편 중 48편이 호러였고 3420만명을 불러모아 전체의 62%를 기록했다. 2024년은 정점이었다. 68편의 호러영화가 5380만명을 동원하며 전체 관객의 66%를 점유한 것이다. 2025년에는 89편의 호러영화가 3210만명을 동원하며 하락했지만, 영화산업 전체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인도네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자국영화의 편수와 관객수가 할리우드 수입작의 두배를 넘어섰다. 호러는 이 역사적 성취의 토대를 놓았다.
인도네시아 호러영화의 성공은 유망한 후속 프로젝트들이 성장할 수 있는 산업의 탄탄한 기반을 구축했다. 이러한 기세는 국제적인 주목을 끌었고, 동시에 현지 제작사들도 자국 시장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해외 인기 IP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 흐름에서 탄생한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가 바로 앙기 움바라 감독의 <폐병원 402호>다. MD픽처스는 한국영화 <곤지암>(2017)의 판권을 확보했는데, 인도네시아 공포 팟캐스트라는 렌즈로 현대 스트리밍 문화를 들여다보는 영화로, 귀신 사냥 프로그램 특유의 선정성과 인도네시아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는 한국 IP를 한 화면에 녹여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호러영화는 어떻게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안정적 발판이 되었을까? 공포라는 감정이 인도네시아인들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힘을 지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인도네시아 군도 전역에 깊이 뿌리내린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다채로운 신앙과 문화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공통된 인식이 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 공존하며, 우리의 역할은 단지 이 공유된 터전을 평화롭게 지켜나가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호러는 그 섬세한 관계를 공포를 통해 재상상하며, 균형이 무너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탐색한다. 공포는 하나의 화폐로 작동하고, 영화는 그것을 신화로 빚어내는 거대한 산업의 동력이 된다. 그리고 지역문화는 영화감독과 스토리텔러들이 마음껏 채굴할 수 있는 자원의 보고가 되었다.
케빈 라하르조와 라프키 히다야트의 <말린 쿤당의 전설> 역시 이와 유사한 길을 걷는데, 배은망덕한 아들이 가난한 어머니를 모른 체하다 돌로 변하는 저주를 담은 ‘미낭카바우’ 민담을 참조한다. 영화에서 돌은 이중의 생명을 얻는다. 주인공이 그림을 그리는 캔버스로서, 그리고 끔찍한 교통사고로 머리에 생긴 흉터 덩어리로서. 사고 때문에 그는 어머니와의 기억을 되찾지 못하고, 의도치 않게 바로 그 배은망덕한 아들이 되어버린다. 익숙한 공포의 감각이 다시 깨어나되 오늘의 감각으로 재해석된 반전 속에서 극의 구도 자체가 새롭게 재편된다.
현대 인도네시아 호러는 오래된 신화를 상업적 이익을 위해 재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최근 작품들은 공포의 대중적 어휘가 또 다른 전략적 목적, 즉 사회비판을 위해 구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도네시아에서 산다는 것은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끊임없이 감내하는 삶이다. 세상이 옳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면서도, 목소리를 높이면 더 큰 힘에 의해 표적이 되거나 조용히 짓밟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 맥락에서 귀신과 괴물은 역설적으로 더 견딜 만한 위협처럼 느껴진다. 반면 권력과 구조적 불의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은 채 끈질기게 지속된다.
조코 안와르 감독은 <고스트 인 더 셀>에서 이 아이러니를 포착한다. 세상의 쓰레기들이 모인다는 교도소. 이곳에서 유령이 연쇄살인을 저지른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광경에도 불구하고 죄수들과 망령 모두 시스템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언어인 ‘폭력’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서사가 진행될수록 불평등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교도소 당국은 그 불균형이 자신들의 물질적 이해관계에 복무하기 때문에 물리적 폭력을 동원해 이를 유지한다. 공포는 잔혹함 자체뿐만 아니라, 잔혹함이 낯설지 않다는 섬뜩한 자각의 순간에서도 온다. 매일 아침 뉴스를 마주하는 많은 인도네시아인의 불안과 공명하는 지점이다.
에드윈 감독의 <슬립 노 모어>도 은밀한 절망을 통해 동시대 인도네시아인의 불안을 이야기한다. 영화는 가발 공장에서 펼쳐진다. 빚더미에 앉은 노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혹독한 교대근무를 버텨내는 가운데, 그들 사이를 괴물이 어슬렁거린다. 그러나 진짜 공포는 노동의 반복으로부터 온다. 카메라는 노동자들의 끝없는 노동을 오래도록 응시하고, 매 프레임은 신체 조율 능력의 점진적인 소실을 담는다. 떨리는 손, 축 처진 눈꺼풀. 신체가 무너질 때 가위, 네일보드, 끓고 있는 화학약품 같은 노동의 일반적 도구들은 돌연 위협으로 돌변한다. 끝없는 노동의 강도와 열악한 환경은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 괴물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하눙 브라만티오 감독의 <더 홀: 핏빛 비극까지 309일>은 실제 쿠데타 미수 사건을 소환한다. 배경은 1965년 9월. 인도네시아인의 기억에 깊이 새겨진 그 달로, 군 장교 중 일부가 자카르타에서 육군 장성 6명을 납치해 살해한 사건이다. 영화는 장성들이 매장된 마을 로방 부아야로 시선을 옮겨, 쿠데타를 앞두고 극도로 긴장감이 고조된 며칠을 따라가며, 원인 모를 연쇄살인이 마을공동체를 뒤흔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공포는 살인을 저지르는 유령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살해당하는 자들의 정체(업보를 짊어진 권력자들)로부터 온다. 정치적 쿠데타도 해내지 못한 것을 한 맺힌 유령이라면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듯, 유령이 희생자를 덮치는 순간마다 썩은 구조를 혁파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듯하다.
위 영화들을 함께 놓고 보면 인도네시아 호러가 단순한 산업적 동력을 넘어 ‘팝’(대중문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새롭게 정의하는 문화적 힘임이 분명해진다. 신화와 사회비판, 그리고 일상에 배어든 불안을 하나로 엮어냄으로써 이 영화들은 대중문화의 경계를 관객이 익숙한 공포와 구조적 불의를 동시에 마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전환시킨다. 시장은 이 이중적 매력 위에서 번성한다. 일상의 불안에 뿌리내린 이야기들에 대한 공감대와 관객들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구조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비판적 시선이 함께 작동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호러는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했다. 로컬하면서도 글로벌하게 공감을 끌어낼 수 있고, 동시에 대중문화 역시 수익성과 정치성을 동시에 품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자리를 말이다.
또한 이 영화들은 인도네시아 호러가 더 이상 하나의 장르에 그치지 않고 대중문화를 재정의하는 하나의 문화적 흐름임을 잘 보여준다. 민담과 날 선 사회비판을 영화에 녹여냄으로써 공포를 스펙터클인 동시에 세상을 향한 발언으로 전환시킨다. ‘대중적’이라는 말이 단순히 많이 팔린다는 의미를 넘어 동시대와 호흡하고 공감하며 때로는 저항한다는 의미일 수 있음을 증명하면서,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은 바로 이 양날의 검 위에서 성장한다. 관객들은 익숙한 이야기에 이끌려 극장을 찾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며 좌석을 떠나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