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좁아, 하루이틀만 쓰레기 배출을 신경 쓰지 않아도 엉망이 된다. 주말에 따로 시간을 내는 건 의미가 없다. 조금이라도 쾌적하려면 부지런히 쓰레기를 들고 나가야 한다. 일정 때문에 나갈 땐 반드시 집에 있는 모든 재활용 쓰레기를 버린다. 그래야 집에 돌아왔을 때 조금이라도 어수선하지 않다. 우리 집 쓰레기 배출의 철학은, 당연히 없다. 누구든, 나갈 때 버린다. 그게 다다. 왜? 안 하면 안 되니까. 그냥 한다.
한손엔 노트북 가방을 들고 한손엔 쓰레기를 가득 안고 현관문을 나설 때가 종종 있다. 비닐 뭉치, 플라스틱, 병, 캔 그리고 종이 박스 등등 한가득이다. 여기에 20리터짜리 종량제봉투라도 있는 날에는 팔이 아프다. 빨리 버리고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데, 이런 날엔 꼭 복병을 만난다. 엄청난 쓰레기가 담긴 거대한 카트를 비좁은 수거장 입구에 세워두고 유유자적한 태도로 하나하나 배출하는 사람 말이다. 여유만만하게 병 하나를 이쪽에, 캔 하나를 저쪽에 둔다. 페트병에 붙은 비닐을 거기서 노래 부르며 뜯는 모습은 마치 ‘비닐은 비닐이요, 플라스틱은 플락스틱이로다’라면서 불경이라도 읊조리는 것 같다.
아이가 함께 있을 때도 있다. 쓰레기가 많으니 가족이 동원되었다고 생각하기엔 아이가 그럴 나이가 아니다. 아장아장 걷는 게 많아야 두돌쯤 되었으려나. 멀리서 보면 아름답다. 걷는 것도 불안한 아이가 부모를 돕겠다고 자기 몸보다 큰 박스를 들고 뒤뚱거리는 모습이 대견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앞에서, 이를 지켜보는 나는 아주 약간 조급해진다. 그렇다고 짜증을 낼 순 없으니 잠시만 기다리자고 다짐한다.
아, 그런데 부모의 말이 자꾸만 귀에 들린다.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자꾸만 일장 연설을 한다. 그게 아빠와 아들일 때 이야기는 투박하다. 요즘 세상은 남자, 여자 하는 일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당연한 말이 갑자기 튀어나오고, 사람은 주변이 깨끗해야 성공한다는 동기부여 강연이 시작된다. 이런 걸 귀찮아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협박 비슷한 문장도 흐른다. 지금 필요한 건 뒤에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 좀더 빨리 그 공간을 사용하고 비켜주는 것인데, 그걸 아이에게 교육시키는 게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 사람은 현재 자신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 1~2분이 지났으려나. 내게 미안하다는 제스처 하나 없이 유유히 사라진다.
한 장면이 겹쳐진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식사를 마친 후 쓰레기통 앞으로 가는데, 내 앞에서 다섯살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쟁반을 위태롭게 들고 있다가 떨어트려버렸다. 먹다 남은 음식물, 그리고 얼음들이 쏟아졌다. 나는 함께 치우려고 몸을 아이쪽으로 향했는데, 어느새 부모가 달려왔다. 아, 부모가 아이에게 스스로 해보라고 시켰다가 수습하러 왔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렇게 말한다. “직접 치워. 네가 먹은 건 스스로 치우는 거야. 엄마는 절대 도와주지 않을 거야.”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쓰레기를 버리려고 기다리는 다른 사람 앞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 아닌가. 그러면 원활한 흐름을 위해 사고 처리가 먼저여야 할 건데, 그 와중에 인생교육을 한다. 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떨어진 얼음을 하나하나 줍고 엄마는 노려보며 기다린다. 역시나 1~2분 후 나를 슬쩍이라도 쳐다보지도 않고 사라진다. 타인이 어떠하든 본인이 의미를 부여한 이 행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일 거다. 그러면 전체가 안 보인다. 누군가를 기다리게 했다는 미안함보다 의미 있는 실천을 했다는 고상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의미를 너무 많이 부여하는 시대다. 그냥 버리고 치우면 될 일인데, 모든 것에 성장의 서사를 부여한다. 일상의 사소한 행위에서 엄청난 것을 증명하려는 강박이 넘쳐난다. 어떤 부모는 아이에게 늘 신발 정리를 시킨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아, 이것도 자랑이 되는구나. 대부분이 그냥 평생 한 일이다. 어릴 때 누가 시켜서 했든, 스스로 했든 그게 습관이 되어 어른이 되어서도 매일 신발 정리를 하는 사람은 그냥 한다. 그냥 하면, 말을 첨가할 필요가 없다.
독서도 빠지지 않는 부모의 자녀 자랑 목록이다. 독서를 하니 아이가 사고력이 달라졌다, 상상력이 풍부해졌다는 결과를 말하는 게 아니라 독서했다는 사실만으로 온갖 해석을 부여한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이 독서를 그냥 했는데 말이다. 새벽형 인간임을 강조하는 것도 비슷하다. 새벽에 일어나면 일어난 거지 그걸로 왜 자신을 노력과 열정의 아이콘으로 포장하려는 것일까. 운동은 말할 것도 없다. 운동을 해서 심신이 건강해졌다면,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다정하면서 운동의 효과를 보여주면 된다. 그런데 운동했다는 것만 알리기 바쁘다. 그러다가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말한다. “그거, 운동하면 괜찮아져.”
의미가 과하면 실수한다. 분리수거 하나에 과도한 의미가 부여되면, 이게 기준으로 사람을 분리한다. 가정교육 잘 받은 아이는 다르다, 자녀교육 철저히 하는 부모는 다르다면서 말이다. 여기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다. 예의 없는 아이는 저렇다, 자녀에게 관심 없는 부모는 저렇다면서 손가락질의 연료가 된다. 수식어도 따라붙는다. 임대아파트 사는 아이들이 그렇지, 최저임금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이렇지 따위로 이야기가 확장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괴기한 초능력을 발휘한다. 자기는 다른 사람 집에 가면 현관에서 신발만 보면 그 집 아이들이 어떤지 다 안단다. 무당인가?
그냥 하면 된다. 버릴 건 버리면 되고, 엎질러진 건 치우면 된다. 청소는 그냥 청소다. 무질서한 공간을 질서 있는 상태로 되돌렸다면 상쾌하게 살면 된다. 독서는 그냥 독서다. 타인의 세계를 경험했다면 일상에서도 겸손하면 된다. 운동은 몸에 저항을 줘서 근육이나 심폐에 자극을 가하는 행위다. 그래서 심신이 건강하게 사는 게 증명이다. 참고로 이 글은 본인이 분리수거도 다 하고 주말엔 청소도 하는데 아내가 육아가 힘들다고 화를 내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어떤 남자의 글을 보고 작성했다. 세상에나, 육아 힘들다는데 분리수거 어쩌고라니. 의미 부여가 이렇게 무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