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홍기빈의 클로징] 패러다임 찾아내기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토머스 쿤의 과학철학을 통해 유명해졌으며 오늘날에는 일상적으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본래 언어학에서 쓰이는 말이었다. 유럽 언어에서 명사와 동사는 인칭, 성, 수, 시제에 따라 무쌍하게 변화한다. 그 변화를 하나의 표로 만들어 제시하는 것이 패러다임이었다. 이를테면 독일어 ‘sein’ 동사의 2인칭 복수 과거형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wart’라고 대답하는 식의 표를 말하는 것이다. 이 표는 그러니까 “질문의 틀”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과학탐구에서 연구자가 풀어야 할 과제로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의 매트릭스도 패러다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의 틀”이라는 말은 그저 피상적인 정의일 뿐이다. 그러한 질문의 틀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엄청난 범위의 “의미망”이 깔려 있어야 하고, 이것이 나오기 위해서는 다시 그 근저에 거대한 세계관이 깔려 있어야 한다. 한 예로 우리 모두의 영어 공부를 골탕먹였던 완료 시제에 대해 생각해보라. 우리로서는 무슨 상황에 부닥치고 무슨 경험을 한다고 해도 결코 “이건 완료 시제야?”라는 질문이 떠오를 수 없다. 우리가 가진 의미망에서는 그런 시간 경험 자체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망 뒤에는 “어떤 사건은 그 뒤의 시점의 세계를 반드시 바꾸어놓게 되어 있으니 이를 포착해야 한다”는 식의 세계관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언어마다 패러다임은 다르며, 한 언어에 적용되는 패러다임을 그대로 다른 언어들에 가져다 붙여봐야 이해는커녕 혼란만 늘어날 뿐이다. 이를 쿤의 용어로 바꾸면 “통약불가능성”이라고 한다.

얼마 전 어느 2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이의 글을 SNS에서 읽었다. 자신의 세대를 기성세대가 재단하고 규정하고 품평하는 방식이 황당하게 느껴진다는 내용이었는데, 날 선 비판이나 논쟁 대신 자신들의 일상과 정서의 엉거주춤함을 묘사하는 형식을 띠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이런저런 잣대를 먼저 들이댄 후 그에 대한 나름의 (파편적일 수밖에 없는) 경험적 관찰에 기반하여 이런저런 답을 내려 그를 통해 “극우”를 포함한 각종 딱지를 붙이고 있지만, 막상 자기들이 느껴지는 자신들의 삶에 그런 드라마틱한 뭔가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50대가 보기에는 굉장히 황당하고 충격적인 행동이라고 해도 자신들은 별 생각 없이 할 때가 많고 별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피시방에서 게임을 할 적에 온갖 패드립을 날린다고 해서 그것이 꼭 가정파괴범과 같은 사악한 의도와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그 글은 무슨 대안적 설명이나 주장을 내놓고 있지 않았다. 기성세대가 자신들에게 들이대는 “질문의 틀” 자체가 낯설다는 것뿐, 그렇다면 자기들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의 틀”이 무엇인지도 명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고백이었다.

그 필자의 탓이 아니다. 어떤 집단이 스스로의 패러다임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들의 삶을 성찰하고 고민해야 하며, 거기에서 어떤 의미망과 세계관을 담아내야 할지 그래서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를 다른 사람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찾아내야만 한다. 패러다임을 찾아낸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며,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놓여 있는 과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