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성적이다. 존재에는 과거가, 역사가 필요하다. 이는 시간보다는 논리적 인과관계를 의미한다. 존재란 무수히 많은 과거의 집적물로서만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은 이성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는 분명 존재한다. 그래도 설명은 필요하다. 꼭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존재에는 이유가 있다. 하나의 존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서사구조가 있어야 한다.
소설가는 존재의 서사구조를 재구성하는 직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느 날 지하철을 탔다. 건너편 자리에 어떻게 저렇게 닮을 수가 있을까 신기할 정도인 모녀가 앉아 있었다. 하루키는 DNA의 위력에 감탄하면서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두 여자를 훔쳐봤다. 그런데 어느 역에서 한명이 아무 인사도 없이 내려버렸다. 그 둘은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소설가 무라카미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서사구조를 만들어냈다.
이십년 전, 어느 일본 여인이 밀림에서 여행중 일행과 떨어졌다. 품에는 아기를 안은 채 헤매다 지치고 배가 고파 잠이 들고 말았다. 그때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 검은 그림자, 젖먹이를 잃은 지 얼마 안 된 원숭이였다. 아기를 빼앗긴 여인은 울부짖었지만 대답하는 건 무심한 메아리뿐이었다. 울다 지친 여인은 마침내 구조되어 일본으로 돌아왔고, 잃어버린 아기에 대한 기억은 조금씩 지워져갔다. 한편 원숭이에게 키워지던 아이는 표범에게 젖어미를 잃었다. 우여곡절 끝에 선교사 부부에게 구출되어 문명 세계로 돌아오고, 일본으로 부임한 양부모를 따라온 아이는 지하철 안에서 운명적으로 생모와 마주친다. 하지만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드디어 만났지만 다시 헤어진다. 그리고 아마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어미 원숭이는 죽었지만 그녀의 저주가 남아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서사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납득시켰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소설은 공감을 얻지 못한다. 납득할 수 없는 소설은 질타를 받는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블록버스터, 혹은 타임 킬링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영화들조차도 빈약한 서사구조에 대한 원죄의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반대로 주인공이 지금 무얼 먹고 싶은지,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 심지어 입을 여는 순간 무슨 말을 할 건지 뻔한 영화 역시 재미가 없다. 아주 작은 조각까지 서사구조의 모든 구성 요소를 완벽하게 맞춰놓은 퍼즐은 관객의 목을 졸라 상상력의 위대한 힘을 질식시킨다. 너무 성글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빽빽하지도 않게, 서사구조를 구축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상상력이 싹트지도 못할 만큼 메말라서도 안 되고 반대로 타들어가도록 기름져서도 안 된다.
안타깝게도 상상력은 저절로 구물구물 피어나지 않는다. 보는 이의 자발적 노력이 필요하다. 상상의 깊이가 깊고 폭이 넓어질수록 관객이 들여야 하는 수고와 노력 역시 비례해서 증가한다. 블록버스터영화의 서사구조가 빈약한 건 꼭 능력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상업영화라면 관객을 지치게 해서는 안 된다. 블록버스터영화의 제작자들은 상상력을 발동시키기 위한 자발적 노력을 기대할 수 없다. 사람들은 블록버스터를 보면서 상상력의 더듬이를 느슨하게 떨어뜨려놓는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래서 즉자적인 볼거리로 서사구조를 대체한다. 나름의 서사구조를 제시하려고 애쓰는 블록버스터가 오히려 나쁜 평을 듣는 경우가 적지 않은 묘한 현상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영화들은 너무나 익숙한 서사를 차용한다. 능력있지만 이기적인 플레이보이가 못생겼지만 착한 여자를 만나 개과천선한다. 예쁘지만 거만한 여자가 노동계급의 성실한 남자 때문에 인생관이 바뀐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동료의 마지막 미소에 절규하는 장면이 나왔다면 영화가 6/7쯤 진행되면 주인공이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구해낼 것을 기대해도 좋다. 주인공을 무릎꿇려놓고 폭탄을 설치한 곳에 대해 떠들어대는 악당이 잠시 뒤 후회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관객은 없다. 이런 이야기라면 설득력이 떨어져도 이해할 수 있다. 수고하고 고통받지 않더라도 서사구조의 파편을 이어맞출 수 있다.
게임과 영화는 다르다
게임 제작자들은 서사구조 구상에서 고민이 적다. 소설이나 영화와는 달리 은밀한 협정이 있기 때문이다. 게이머는 관객이 아니다. 외부에서 구경하는 게 아니라 직접 나서서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은 허술한, 또 조금은 과장된 이야기에도 얼마든지 감동할 수 있다. 아무 생각없이 느긋하게 살던 시골 총각에게 왕의 부름이 내린다. 난데없이 영웅의 후손이라며 납치된 공주를 구해 오란다. 기꺼이 받아들여 모든 걸 팽개치고 모험에 나선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걷잡을 수 없는 감동에 몸이 떨린다. 예쁘고 똑똑하고 콧대까지 높은 동급생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에게 고백을 해온다. 남루한 현실과 비교하며 코웃음을 치기보다는 감동의 폭풍에 휩싸인다. 그게 게임이다. 직접 플레이해보지 않은 사람이 게임의 서사구조를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
아무리 깊이있는 이야기라도 게임 시스템이 받쳐주지 못하면 살아나지 못한다. 역으로 게임성이 담보된다면 빈약한 스토리라도 감동을 줄 수 있다. 게임에서는 실존에 대한 승인이 개연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모험에 나서는 용사의 선택에는 이유가 필요없다. 실존이 의심받는 건 게임이 재미없을 때뿐이다. 그 순간 게이머는 패드에서 손을 떼고, 지금까지 게임세계를 지탱해왔던 게이머와 게임 사이의 공모가 깨진다. 지금까지 게임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이 적지 않았지만 대개 실패했다. 게임의 인기에만 편승하려한 안이한 기획, 게임장면을 제대로 구현못한 기술적 한계 등 이유야 많지만 실패의 근본적 원인은 게이머와 게임 제작자의 은밀한 공모가 영화에서도 유효할 것이라고 착각한 데 있다.<모탈 컴뱃>이나 <마리오 브러더스>처럼 줄거리보다는 액션에 치중했던 게임은 물론이고, <파이널 판타지>처럼 감동적인 줄거리로 이름을 날린 게임조차도 영화화되어서는 빈약한 서사 구조를 보여주었다. <툼레이더>는 앞의 영화들과는 달리 흥행에서 선전했다. 하지만 서사구조는 역시 보잘것없었다. 안젤리나 졸리의 라라 크로프트가 없었다면 <툼레이더>를 본 사람 수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게임과 영화는 같다
<레지던트 이블> 역시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원작 <바이오해저드>는 플레이스테이션, 새턴, 드림캐스트, PC 등 거의 모든 플랫폼을 누비며 1천만장 가까운 판매고를 올린 게임이다. <레지던트 이블>은 <바이오해저드>의 미국 출시명이다. 흥미롭게도 영화 <레지던트 이블>은 철저하게 게임을 흉내내어 서사구조를 구축했다.
영화는 퇴근 준비로 분주한 한 회사로부터 시작된다. 단순한 기업 수준을 넘어 초법적 기관으로 존재하는 엄브렐러답게 거대한 건물에 많은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불길한 파란 액체가 담겨 있는 시험관이 바닥에 떨어지고, 보안 시스템이 미쳐 날뛰는 속에 사람들은 처참하게 죽어간다. 아무 설명도 없이 카메라는 밀라 요보비치의 현란한 육체로 옮겨진다. 잠에서 깨어난 여자는 붉은 슬립만 입은 채로 어딘지 비현실적인 화려한 저택을 거닌다. 그리고 특수부대가 진입한다.
영화가 상당 부분 진행될 때까지도 여자가 누구인지, 왜 저택에서 혼자 자고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녀의 신분과 특수부대의 임무가 열려진 뒤에도 그 대단한 엄브렐러의 비밀 출입구를 왜 단둘이서 지키고 있었는지에 대한 개연성은 주어지지 않는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엄브렐러를 해체하겠다는 각오를 품은 사람이 있지만 엄브렐러가 어디가 왜 나쁜지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레지던트 이블>의 실존이 승인되는 데는 설명이 필요없다. 연구소라는 던전에서 적과 싸우는 과정이 재미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강약과 완급이 적절하게 조절되는,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능수능란한 액션은 사랑하던 사람이 배신해도, 적과 친구의 위치가 역전돼도 중단되지 않는다. 미스터리와 갈등은 서사라기보다는 더 화려한 액션과 색다른 몬스터를 등장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많은 게임에서 게이머는 주인공 이름을 직접 붙일 수 있다. 게이머와의 일체감을 높여 은밀한 공모를 좀더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다. 붉은 슬립과 가죽 재킷의 전사 밀라 요보비치 역시 이름이 거의 불려지지 않는 것을 보면 <레지던트 이블>이 소설보다는 게임의 적자를 자처한다는 의혹이 더욱 짙어진다.
영화를 보는 데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정지된 낱장의 사진들을 연속된 움직임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서사적 상상력이 꼭 필요하다. <레지던트 이블>에서는 이 과정을 노골적으로 배제한다. 지금 왜 여기 있는지에 대해 관객이 아는 건 약물 때문에 기억이 지워진 밀라 요보비치보다 나을 게 없다.
<레지던트 이블>은 다른 액션 블록버스터들과는 달리 존재의 원죄의식을 완전히 떨쳐버렸다. 관객을 설득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액션과 액션 사이를 얼기설기 엮어놓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 스포일러에 대해 조금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한국과 스페인전 다음날 아침인데도 거의 꽉 찬 극장에서 영화 내내 잡담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숨을 돌리며 서사구조의 빈약함을 비난할 순간은 없었다. 액션이 끊기지 않는 한 실존을 뒷받침할 근거의 공백은 무시되었다. 아니, 공백은 없다고 전제되었다. <레지던트 이블>은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게임을 재현한 영화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