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건 감독이 연출한 <슈퍼맨>의 마지막 부분, 짤막하게 등장한 금발 여성을 기억하는가. 크립토를 데리러왔다는 술 취한 바로 그 어린 여자. 슈퍼걸이다. 23번째 생일을 맞이한 카라 조엘(밀리 올콕)은 크립토와 함께 우주를 여행하던 중, 루시라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루시는 아버지가 우주 해적에게 살해당하고, 그에 대한 복수를 위해 카라 조엘에게 도움을 청한다.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분노와 복수의 여정. 슈퍼맨보다 훨씬 더 거칠고 상처 많은 인물로 묘사되는 슈퍼걸은 할리우드의 아이코닉으로 떠오르는 밀리 올콕의 얼굴로 그려지며 Z세대의 쿨하고 힙한 영웅으로 거듭난다. 다음 세대의 히로인을 탄생시키기 위해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과 배우 밀리 올콕은 이렇게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밀리 올콕의 슈퍼걸
밀리 올콕이 DC 제작자 피터 새프런을 처음 만난 건 2023년이다. 영화가 아닌 편안한 친목의 자리였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오디션 녹화에 참여할 의향이 있냐는 이메일을 받았고 실제로 오디션 반응이 무척 좋았다. 애틀랜타에서 여러 단계의 스크린 테스트가 이어지던 어느 날, 밀리 올콕은 제임스 건으로부터 문자 한통을 받았다. “데드라인의 기사 링크였다. 내가 <슈퍼걸>에 합격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도 전화로 알려주지 않더라. (웃음) 정말 비현실적이고 꿈같았다.”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 또한 밀리 올콕과 함께한 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밀리 올콕은 제임스 건이 뽑은 배우다. 내가 가장 놀란 건 그가 배우로서 지닌 프로 정신이었다. 출연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촬영 때마다 일찍 와서 한 시간 동안 대본 리허설을 마치더라. 그게 어떤 장면이든, 감정적인 장면이든 다른 언어로 진행되는 장면이든 미학적 장면이든, 그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소화해냈다. 기술적으로 잘해서가 아니라 모두 노력과 공을 들여 얻어낸 것들이다. 감탄했다.”
슈퍼걸을 위한 세계관 구축하기
<슈퍼걸>은 DC 유니버스의 한 부분이지만 그만의 독창적이고 개별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은 본격적으로 촬영하기 앞서 가장 도전적인 일로 세계관 구축을 꼽았다. “이게 가장 어려운 일일 줄 몰랐다. (웃음) 거대 세계관을 창조하는 게 이토록 어렵다니. 행성이 9개 정도 있고, 언어는 5개였나? 6개? 외계종족은 50종에 다다르고 소품은 수천개다. 이 모든 걸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촬영장에서 커피 달라는 말을 정말 많이 했는데 그때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커피는 어느 행성에서 온 거야? 어떻게 마시는 거야? (웃음)” <슈퍼걸>의 세계관이 안정적으로 구축될 수 있도록 밀리 올콕 또한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중에서도 체력 훈련에 만전을 기했다. “매주 5일 개인 트레이닝을 받고, 또 그외에 주 5일 2시간씩 스턴트 훈련을 받았다. 넘어지는 법, 타격 받는 법, 다른 배우와 합을 맞추는 법 등을 단계별로 배웠다. <슈퍼걸>의 기본 요소를 소화하기 위해서 많은 것에 습관처럼 매달렸다. 고난의 정점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게다가 모든 게 처음이라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워낙 활동적인 성향이라 그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슈퍼맨과 다르게, 슈퍼걸만의 고유성으로
많은 사람들과 오랜 역사를 함께한 <슈퍼맨>시리즈와 <슈퍼걸>은 어떻게 다를까.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은 <슈퍼맨>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결핍이 <슈퍼걸>의 정체성이 된다고 말한다. “슈퍼맨은 사랑이 넘치고 보살핌이 가득한 가정에서 자랐다. 평생 슈퍼히어로가 될 것 같다. 반면 슈퍼걸인 카라 조엘은 크립톤에서 자라면서 자신의 문명 전체가 멸망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부모님까지 잃고 난 뒤에는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행성에 착륙하고. 모든 삶의 책임이 어린 여자에게 강제로 떠맡겨진 셈이다. 슈퍼맨과는 완전히 다른 배경과 신념 체제. 그것이 오늘의 <슈퍼걸>을 완성했다. 무엇보다 슈퍼맨과의 도덕적 기준도 다르다.” 슈퍼맨이 정의와 선함을 강조했다면, 슈퍼걸은 자신의 기준에 맞는 정의와 선을 찾는다. 기성세대인 슈퍼맨이 구축해둔 규칙을 무조건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슈퍼걸의 특이점이다. 밀리 올콕 또한 인물 분석 과정에서 슈퍼맨으로부터 구별되는 카라 조엘이 지닌 개별성이 영화를 완성하리라 판단했다. “<슈퍼걸>과 비슷한 무드의 히어로물들은 반드시 주인공의 결점을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나는 그게 꼭 옳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것을 무조건 좋아하기보다,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그 사람의 결점을 그 자체로 두려는 것. 이러한 태도가 많은 여성 히어로들에게 필요하다.”
<슈퍼걸> 현장 비하인드 스틸. 밀리 올콕, 롭 하디 촬영감독,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왼쪽부터).
전 세계 소녀들에게 가까워지기
<슈퍼맨>을 보고 자란 소년들이 슈퍼맨이 되기를 꿈꿨던 것처럼, <슈퍼걸>을 보게 될 어린 여자아이들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될까. 카라 조엘이 되어본 밀리 올콕은 자기만의 기준을 가장 우선하는 캐릭터 성향처럼 그들이 자기만의 삶의 기준을 가질 수 있길 바랐다. “영원히 선하게 지내기 위해서 때로는 나빠져야 한다는 것을 소녀들이 알게 되면 좋겠다. 카라 조엘은 결함이 있지만 변명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삶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슈퍼걸>을 통해 아이들이 나침반을 경험하길 바란다. 사회적 공간에서 위치와 목표를 인식하는 소셜 나침반. 그리고 그것이 <슈퍼걸>에서 비롯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