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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인공지능, 숏폼 그리고 대한민국 - 정재현 기자의 제30회 필마트 참관기
정재현 2026-04-02

ⓒSERENA CHEUNG

“그래도 필마트는 와야죠.” 홍콩 출장 기간 중 이곳저곳에서 스치듯 만난 국내 영화수입사 직원들이 하나같이 건넨 인사다. 3월17일부터 20일까지 나흘간 홍콩 컨벤션 센터에서 홍콩무역발전국(HKTDC) 주최로 제30회 필마트가 열렸다. HKTDC가 올해 설립 60주년이니, 필마트는 HKTDC 역사의 절반을 함께해온 셈이다. 지난 30년간 필마트는 아시아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마켓이자, 한해의 상반기에 베를린국제영화제의 유럽필름마켓과 칸영화제의 칸필름마켓 사이 필수로 방문해야 하는 엔터테인먼트 행사로 성장했다. 기념비적 숫자 덕분인지 올해 필마트는 역대 가장 성대한 규모로 행사를 열었다. 38개국 및 지역에서 790개 이상의 스튜디오가 합류해 작품을 선보이고, 약 50개국 및 지역에서 온 7700명의 방문객이 사전 등록을 마쳤다. 필마트가 개장하는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모든 부스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미팅이 열렸고 부스별 웅성임은 거대한 백색소음으로 뭉쳐 주기적으로 스마트워치를 울렸다. 덕분에 내가 체류 기간 내내 읽은 한국어 문장은 아래와 같다. “소음 레벨이 극한에 다다랐습니다. 약 30분 동안 이 레벨에 노출되면 일시적으로 청각 손실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올해 필마트는 영화나 TV 이외의 주제에 심혈을 기울인 인상이다. 연일 인파로 북적인 공간은 AI 허브와 AI 아카데미다. 지난해 첫선을 보인 AI 허브는 알리바바 클라우드, 바이두 등 중국 본토의 AI 기술 기업들이 글로벌 진출을 도모하기 위해 집결한 구역이다. AI 허브는 올해 다양한 포럼을 열어 영화예술과 생성형 AI의 상생을 논했는데 MBC C&I의 AI 콘텐츠랩 총괄인 이상욱 팀장이 주요 연사로 자리했다. 이상욱 팀장은 “지지난해까지만 해도 AI 소재로 영화마켓에 등판하면 비즈니스적으로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모두가 AI 콘텐츠만 이야기한다. 이제 창작자의 시선과 개발자의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또 다른 비즈니스 기회가 창출되지 않을까”라고 콘텐츠의 미래를 진단했다. 필마트는 올해 AI 아카데미를 신설했다. 프로덕션 전체에서 AI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18개의 주제로 나누어 강의하는 워크숍 프로그램이다. 이중 내가 들은 워크숍 제목은 ‘생성형 AI 콘텐츠의 저작권 보호 및 침해 리스크’였다. 소개만 언뜻 보았을 땐 인간 창작자가 인공지능으로부터 저작인격권과 저작재산권을 보호받는 수단을 강의하는 클래스로 알았다. 놀라지 마시라. ‘AI 창작물’이 어떻게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다른 AI로부터 데이터 수집을 방지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정신이 아찔해지던 찰나 지난해 <씨네21>기자, 평론가로부터 높은 별점을 받은 영화를 수입한 모 수입배급사 직원으로부터 메시지 한통이 왔다. 어느새 회사로 오는 보도메일의 대부분엔 영화 라인업보다 애니메이션, AI, 숏폼의 비율이 눈에 띄게 증가 중이라고. 예술영화의 수입, 배급으로 이름을 알린 회사에도 AI 콘텐츠와 숏폼 배급 문의가 거듭 들어온다고.

숏드라마,새 수요를 창출하다

ⓒSERENA CHEUNG

5주 전 <씨네21>의 특집이었던 ‘숏드라마의 생태학’에 참여했음에도, 바로 지난주 숏드라마 감독들이 <씨네21>의 표지를 장식했음에도, 나는 숏폼 시리즈가 미디어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유보적이었다. 전 세계 시장이 숏드라마에 주목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이 시장에서 새로운 수요가 매일 창출된다는 걸 필마트에 가서야 비로소 실감했다. 컨벤션 센터에 들어서니 부스의 1/6은 모두 중화권 숏드라마 제작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릴숏 개발을 선도한 중국의 디지털콘텐츠 기업 COL 그룹, 싱가포르에서 운영하는 글로벌 숏폼 플랫폼 드라마박스는 물론 국제숏폼드라마협회는 통상 국가 단위에서 설치하는 파빌리온을 필마트 내에 세웠다. 한국관, 일본관처럼 숏드라마관이 영토처럼 기능한 것이다.

필마트는 개최 기간 동안 다양한 데이터 분석가들을 초빙해 숏드라마가 몇년 새 이룬 성취를 통계로 증명해냈다. 미국의 경우 지난해 숏드라마 시장이 글로벌 박스오피스 시장의 1/3에 달하는 110억달러(약 14조원)의 매출을 올렸고, 중국에서는 거의 1천억위안(약 19조원)에 달하는 수익을 달성했다. 전 세계 유저들은 평균적으로 일일 30분씩 숏드라마를 시청했다. 이는 각종 스트리밍서비스의 평균 시청 시간보다 11분 정도 긴 수치다. 하지만 인기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숏드라마 시장에 관심과 투자가 몰리진 않을 터. 숏드라마의 투자 이윤은 예측 가능성으로부터 나온다. 높아진 극장의 문턱에 따라 시장 예측이 어려운 영화 개봉과 달리, 숏드라마는 타깃 고객의 데이터를 플랫폼이 정확히 제공하는 것은 물론 전환율(마케터가 유도한 행동을 구매자가 완료한 비율.-편집자) 측정 또한 쉬워 수요 분석을 기반으로 투자 대비 수익률(ROI)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제공하는 자료는 말하나마나 AI로부터 온다.

이를 입증한 시장이 중국이다. 숏드라마 제작사 선전마이크로숏드라마서비스센터의 로신 대표는 “숏드라마 시장은 배급과 유통 단계에서도 AI를 활용한다”라며 “대본 기획 단계부터 AI를 활용해 글로벌 타깃에 맞는 다국어 버전과 로컬라이제이션(현지화)을 미리 설계하”는 동시에 “선전시에 입점한 다양한 AI 기업과 숏드라마 제작사를 연결해 시 차원에서 숏폼 산업 전체를 아우르는 ‘AI 효율화 솔루션’ 프로젝트가 이미 진행 중”이라고 귀띔했다. 한국의 지역콘텐츠진흥원과 마찬가지로 선전시 또한 숏폼을 통한 내수 진작을 위해 로케이션 사업을 도모 중이다. 다만 그 규모가 다르다. “선전시는 단일 프로젝트당 최고 200만위안을 지원하며, 선전 지역에서 촬영할 경우 150%를 추가 지원하는 정책이 이달 초 발효됐다.”(로신) 선전시의 또 다른 숏드라마 제작사인 만센문화미디어유한공사의 진소천 부대표는 AI를 활용한다면 애니메이션 산업 역시 숏폼 시장에서 융성할 기회가 있음을 역설했다. “우리는 매월 대략 30~50편의 숏폼을 찍는다. 실사 숏폼의 편당 제작비는 보통 100만위안인 반면 올 2월 더우인(중국의 숏폼 플랫폼)에서 3억뷰를 넘기며 초대박이 난 우리 회사의 숏폼 애니메이션은 20만위안이 들었다. 하지만 섣불리 접근하진 말라고 조언하고 싶다. 실사 숏폼은 촬영에 대부분의 시간이 들어간다면, AI 숏폼은 후반작업에 시간이 소요된다. 스크립트(프롬프트)를 입력해서 이미지나 영상을 생성한 후 그 결과물이 대본과 완벽히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수정하는 과정은 인간이 수행하기 때문이다.”

한국 콘텐츠의 소구력은어디서 오나

올해 필마트는 영화나 TV 이외의 주제에 심혈을 기울인 인상이다. 연일 인파로 북적인 공간은 AI 허브와 AI 아카데미다. ⓒSERENA CHEUNG

모든 길은 한국으로 통한다. 올해의 필마트를 요약하는 문장이다. 우선 올해 필마트의 한가운데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한국영상위원회를 구심점으로 한 한국의 부스가 위치해 있었다. 덕분에 참가자들은 미로같이 복잡한 필마트에서 길을 잃어도 한국 홍보관을 기준으로 경로를 재탐색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은 AI와 숏드라마 일색인 올해 필마트에서 수많은 바이어들에게 경로 재탐색의 기회를 제공했다. 필마트의 본질인 영화 그리고 TV 콘텐츠의 힘을 나흘 내내 입증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필마트의 개막일.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주최한 ‘K콘텐츠 하이라이트 쇼케이스’가 행사 전체를 여는 첫 이벤트였고, 스크린데일리에서 발행하는 필마트 일간지 1호엔 <왕과 사는 남자>의 한국 박스오피스 소식과 해외 선판매 여부가 1면 단신에 게재돼 있었다. 그리고 연일 경신되는 <왕과 사는 남자>의 한국 흥행 소식은 필마트 기간 동안 해외 바이어들이 한국 제작사들과 미팅을 잡도록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지난해 칸필름마켓과 아시안필름마켓까지만 해도 한국 제작사들이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이렇다 할 흥행작이 없다 보니 기존의 한국영화 구매에 적극적으로 나서던 해외 바이어들도 보수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왕과 사는 남자>가 한국 극장산업을 부흥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다시 한국영화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최윤혁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대리) 그래서인지 <파묘>에 이어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을 견인한 배급사 쇼박스의 부스는 연일 북새통을 이뤘다. 쇼박스의 안정원 해외사업팀 수석부장은 <왕과 사는 남자>를 두고 “아무리 한국의 유명 배우가 출연한 작품이라 해도, 한국의 사극이 해외 관객들에겐 그야말로 먼 나라 이야기”라며 “한국에서의 흥행 돌풍, 그리고 영화가 표방하는 휴머니즘을 중점을 둔 채 세일즈 전략을 수립 중”이라고 밝혔다.

쇼박스는 이외에도 이미 <부산행>으로 해외 팬덤을 확보한 연상호 감독의 <군체>, 전 세계 관객 보편에게 호소 가능한 호러 <살목지>를 주요 작품으로 내세웠다. 이 프로모션은 올해 필마트에서 한국 콘텐츠를 향한 수요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지표다. 해외 바이어들에게 한국 콘텐츠 시장은 장르물의 보고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성공 이전에도 <시그널> <킹덤> 등 선 굵은 장르물을 제작한 에이스토리의 우예리 글로벌사업팀 중화권 담당자는 장르가 명확한 작품이 해외 시장에서 선호도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넷플릭스나 디즈니+ 등 해외 플랫폼에서 인기를 얻는 한국 작품들이 대개 미스터리물, 액션물 혹은 범죄 누아르 아닌가. 필마트에서 주력해 홍보한 작품도 <크래시> 시즌2다. 국내에서 시즌1의 반응이 좋아 시즌2 제작까지 성사됐는데, 작중 교통범죄수사팀(TCI)을 마치 한국의 <CSI: 과학수사대> 연작 속 CSI처럼 프로모팅 중이다.” 이는 시리즈나 예능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제작사 SLL은 스튜디오별로 단 한 작품을 소개하는 ‘K콘텐츠 하이라이트 쇼케이스’에서 예능 <냉장고를 부탁해> 시즌2를 홍보했다. 쇼케이스 무대에 올랐던 박혜진 SLL 중화아시아IP 과장은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 불을 지핀 요리 서바이벌 장르에 대한 수요를 겨냥한 것이다. 다만 치열한 경쟁보다는 셰프간 케미스트리를 포함한 예능 요소들을 포함해 출연진의 면면, 혹은 해외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K팝 아이돌의 게스트 출연을 중심으로 셀링포인트를 잡았다”라고 발표작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박혜진 과장의 언급처럼 K콘텐츠가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각광받으며 출연진의 인지도 역시 한국 콘텐츠 구매에 주요 변수로 작용한다. <와일드 씽>과 <경주기행>을 갖고 필마트를 찾은 이해원 롯데컬처웍스 콘텐츠사업팀 대리는 “<와일드 씽>의 경우 K팝 산업을 다루긴 하지만 그보다는 강동원 배우의 유명세가 주요 셀링포인트다. 해외 바이어들이 근래 액션이나 드라마 장르에서 자주 접한 강동원 배우가 코미디로 복귀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중이다. <경주기행> 또한 <기생충>의 이정은, 박소담 배우가 출연한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공효진 배우의 존재가 주목받는다”라고 유명 배우의 주목도를 강조했다. 시리즈와 예능 세일즈에 집중하는 CJ ENM 역시 이에 동의한다. “가령 동남아시아 시장은 선호하는 한국 배우의 얼굴조차 분명하다. 스토리와 작품의 컨셉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해도 해외 업자들이 제일 처음 질문하는 요소는 역시 캐스팅이다. CJ ENM은 이미 제작이 완료된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후 라인업을 질문하는 바이어들이 종종 있는데, 그들 또한 지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와 장르의 검증 유무를 질문한다.”(정소정 CJ ENM 해외IP 영업부)

AI와 숏폼. 여전히 전통적 관점에선 배척 대상인 두 존재가 올해 필마트의 지형도를 뒤흔들었다. 이는 미디어생태계의 급격한 전환을 상징하는 지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글로벌 바이어들의 발길이 한국 콘텐츠로 향했다는 사실에 약간의 희망을 건다. 숏드라마 특유의 빠르고 압축적인 내러티브와 AI의 효율성이 시장의 수요를 창출하고 있지만, 결국 전 세계 관객을 매료시키는 본질은 사람이 빚어내는 연기와 서사, 그리고 그들로부터 출발하는 오리지널리티에 있기 때문이다. 필름 메이커의 고유한 힘만큼은 결코 대체될 수 없음을 제30회 필마트에서 보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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