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로 이름을 알렸던 홍진훤 감독은 2021년 첫 장편영화 <멜팅 아이스크림>을 내놓았다. 영화로 공개할 계획이 없던 작업이었으나, 사진과 영상의 이질감을 전면에 드러내며 다큐멘터리계의 화제작이 되었다. 두 번째 장편영화 <오, 발렌타인>은 <멜팅 아이스크림>을 시작으로 감독이 ‘패배 3부작’이라 명명한 시리즈의 연속이다. <멜팅 아이스크림>이 훼손된 사진의 복원을 구실 삼아 민주화운동이 지닌 공백의 역사를 살폈다면, <오, 발렌타인>은 2004년 2월14일 분신, 투쟁한 현대중공업의 하청노동자 고 박일수 열사의 이야기를 토대 삼아 노동운동에 관한 지금의 논의를 던진다. 박일수 열사와 가까웠던 노동자였으나 지금은 산속의 시인으로 사는 조성웅씨,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에 힘썼으나 지금은 창녕의 민중가수로 활동하는 우창수씨의 인터뷰가 그 중심이다. 다만 영화는 좌우로 양분된 화면을 통해 사진, 영상, 스톡 이미지 등 갖가지 이미지를 충돌시키고 혼란스러운 앰비언스를 가미하면서 선형적인 위인의 일대기를 거부한다.
- 감독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작품이다. 박일수 열사 사건에 관한 집회를 직접 경험했다고. 이 사건을 20년 뒤에 다뤘을 때의 마음은 어떤가.
당시엔 노동운동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우면서 화도 났다. 지금은 운동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 운동의 에너지가 변화했음을 차갑게 살피게 된다. 이제 노조는 혐오의 대상이고 노동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거대 주체로 이해되지도 않는다. 이런 시대가 되어버렸기에 나에게 시작점과 같은 그때를 정리해서 남겨두고 싶었다. 어찌됐든 운동은 계속될 것이니 이번 작품이 노동운동을 보는 시선의 변곡점이 되거나 재인식의 계기가 되면 좋겠다.
- <멜팅 아이스크림>은 민주화운동, <오, 발렌타인>은 노동계급투쟁의 마지막을 목격한 이야기라고 언급한 적 있다. 다만 방금은 운동이 계속될 것이라고도 거론했다. 양립하는 표현 같기도 한데.
두 영화를 ‘패배 3부작’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와 비슷한 맥락이다. 세상을 바꾼 사건은 대개 승리가 아니라 패배의 역사였다. 러시아혁명에 이은 스탈린의 시대처럼 명백한 승리 선언 이후엔 극심한 후폭풍이 잇따르게 된다. 대신 운동을 실패가 아닌 패배라고 호명함으로써 한번 더 싸울 수 있다는 에너지와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니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패배했으나 종료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작품으로는 일부러 ‘저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도 열심히 투쟁하고 있는 분들은 반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오히려 현재의 운동 상태도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다.
- 요즘 메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 같다. ‘영화는 끝났다’라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영화에 가장 집착하는 부류다. 또 다른 모순은 영화가 박일수 열사 사건을 중심으로 삼되, 그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성웅, 우창수씨와 인터뷰할 때는 박일수 열사가 어떻게 싸웠고, 비화는 어땠고, 이념적 배경이 무엇이었는지를 정말 길고 자세하게 들었다. 다만 <오, 발렌타인>의 목적은 박일수 열사의 투쟁이 갖는 현재성을 드러내는 거였다. 당대 사람들과 지금 세대가 박일수 열사의 유서를 보는 감각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유서를 보여준다 해도 그 의미를 올곧이 전달될 리는 만무하다. 불가능하다.
- 유사한 맥락에서 조성웅, 우창수씨가 인터뷰하며 전하는 말들도 일종의 사운드디자인처럼 썼다. 그들의 말이 필요했다기보다는 이미지의 대척에 둘 수 있는 대립항이 필요했던 것 같다.
맞다. <멜팅 아이스크림> 때도 세명의 증언을 구하면서 “지금 하는 얘기가 보는 이에게 잘 전달되진 않을 것이고, 내 목적은 당신들이 찍었던 사진을 비판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아무리 재현 매체일지라도 완전한 재현을 해낼 수는 없다. 대신 이미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 그것들을 어떻게든 새로이 조합하고 충돌하게 하는 일이다. 말하는 이들의 에너지를 다른 방식으로 증폭하는 거다. 다행히도 <멜팅 아이스크림> <오, 발렌타인>의 인터뷰이들 모두 영화를 보고 나서는 이 태도에 동의한다고 얘기해줬다.
- 스플릿 스크린의 형식도 언어를 교란하고 이미지의 충돌을 강조한다.
관객에게 계속해서 할 일을 주고 싶었다. 어떤 것을 볼지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었다. 사진과 영상의 이질감을 드러내려는 목적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88~89년 현대중공업의 128일 투쟁을 찍었던 사진들이 삽입되는데, 이 사진에 씌워진 상징성을 어떻게 해체하고 새로운 운동으로 연결할지 고민하다가 사진과 영상을 병치했다. 사진과 영상이 지닌 시간의 방향성이 정반대이기에, 보는 이들 역시 자신이 어느 시간대로 가야 할지 쉽게 판단할 수 없게 된다. 관객이 박일수 열사의 기억으로, 혹은 조성웅씨나 우창수씨의 말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고 자기를 각성할 수 있는 감각을 느끼게 하는 거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스톡 이미지는 무시간적 이미지의 맥락으로 또 다른 혼란과 자극을 초래한다. 지금은 이미지가 사고의 토대가 되는 시대이니 이미지로 박일수 열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다.
- 이미지의 충돌 작업을 콜라주라고 표현하더라. 영화에서는 보통 몽타주라고 말하는데, 차이가 있는 것일까.
없다. 같다고 머릿속으론 생각 중인데 몽타주라는 단어가 입에 잘 안 붙을 뿐이다. 전시장에서의 콜라주란 3차원 세계 안에서의 조합이고, 극장에서의 몽타주란 순차적인 타임라인 안에서의 작동이긴 하겠다. 이미지의 역학 관계를 재편한다는 의미에서는 같다고 느낀다. 다만 전시장과 극장의 관람 경험은 완전히 다르다. 극장은 관객의 수동성을 극한으로 키우고, 연출자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 힘의 구조가 다르기에 작품도 달라야 한다는 마음이다.
-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큐브와 블랙박스를 오가는 작업이 늘어나고 있다. 왜일까.
미술도 영화도 답답한 벽을 마주한 것 같다. 매체의 문제라기보단 사회적 변화가 가져온 자연스러운 단계라고 느낀다. 한국미술이 지녔던 근본적 힘은 일종의 3세계성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의 상황, 사람들의 태도와 마인드셋은 1세계에 가까워졌다. 우리가 늘 비판했던 위치에 가고 나니 정체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니 어떻게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 아닐까.
- 역사적 패배를 기록하는 ‘패배 3부작’의 과정도 패배의 연속일까.
지금도 계속 패배하고 있다.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커질수록 소멸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카이빙은 권력의 기재이고, 그 바깥의 무언가는 삭제될 수밖에 없는 숙명에 처한다. 그럼에도 이 아카이브의 구조와 계속 싸우는 힘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힘이 닿는 데까지, 지금뿐 아니라 미래의 관객에게 어떠한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부딪치는 것이 시각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일이 아닌가 싶다. 비판도 받고 지금 시대에 무슨 소용이냐는 말도 많이 듣지만, 시대 전반의 권력관계 안에서 또 다른 시도와 힘이 존재했음을 남기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