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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노프스키 의 영상에 새긴 ‘낙서’ 두편
2002-07-02

파격적이고 강렬한 영상으로 주목받고 있는 미국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33)의 데뷔작 〈파이〉와 두 번째 작품 〈레퀴엠〉이 12일 한꺼번에 개봉한다. 수입사 미로비젼은 직영극장 미로 스페이스 개관 기념작품으로 〈레퀴엠〉을 개봉하고, 매일 마지막회에는 〈파이〉를 상영한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아로노프스키는 그래피티(낙서, 문자벽화)를 그리며 십대 시절을 보내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기 위해 하버드에 진학한다. 대학 1학년 때 우연히 도서관에서 자신의 출생지 지명이 눈에 띄어 읽기 시작한 허버트 셀비 주니어의 장편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로 인해 그는 셀비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갈망을 품는다. 그의 두 번째 작품 〈레퀴엠〉(원제 : Requiem for a Dream)은 셀비의 원작 소설을 소원대로 셀비와 함께 각색한 것이다.

하버드 영화과 졸업반 때 만든 〈슈퍼마켓 스위프〉(출연 숀 굴레트)로 전미학생아카데미상을 받은 그는 5년 뒤인 1996년 단짝인 숀 굴레트와 함께 〈파이〉를 구상해 98년 완성한다. 친구들에게 6만달러를 빌려 만든 〈파이〉는 그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흥행에도 성공해 35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이어 99년 작업에 착수해 2000년 완성한 두 번째 작품 〈레퀴엠〉으로 아로노프스키는 현란하고 극단적인 스타일리스트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다. 두 편의 성공에 힘입어 아로노프스키는 현재 배트맨의 다섯 번째 연작인 〈배트맨 : 이어 원〉(주연 커트 러셀)의 감독을 맡아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중에 있다. 그가 매만진 배트맨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뚜껑을 열어봐야겠지만, 일단은 독립영화에서 출발해 할리우드 주류 감독으로 매끄럽게 편입해 들어간 경우라 할 수 있다.

중독된 영혼을 위한 '레퀴엠'

혼자 사는 세라 골드파브(엘런 버스틴)는 초콜릿 먹으며 텔레비전 다이어트 강의 쇼를 보는게 유일한 낙이다. 어느 날 이 쇼의 출연 제으를 받고 들뜬 세라는 젊은 시절 입던 빨강 드레스가 맞지 않자 알약을 복용하는 위험한 살빼기를 감행한다.

세라의 외아들 해리(자레드 레토)는 어미의 분신과도 같은 텔레비전을 거듭 팔아치우며 마약 살 돈을 마련한다. 해리와 여자친구 매리언(제니퍼 코넬리)은 해로인에 빠져 달콤한 환상을 즐긴다. 알약의 복용횟수를 늘려가던 세라는 약물중독자로 변해 오지 않는 방송사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며 폐인으로 변해간다. 해리는 마약 값을 벌기 위해 친구 타이런(말론 웨이언스)과 마약딜러로 나서지만, 타이론은 거대한 조직에 짓밟히고 해리는 팔이 썩어들어간다.

<레퀴엠>은 환상에 중독된 영혼을 위한 진혼곡이자, 깨어진 꿈의 잔해에 그린 암울한 그래피티다. 대중매체의 성공신화에 중독되든 약물에 중독되든 주입된 환상은 깨어날 때 환멸로 변한다. 감독은 여름·가을·겨울(봄은 없다!)로 구성된 세 장에서 세라, 해리, 메리언 세 인물이 예정된 파멸을 향해 치닫는 과정을 잔인하리만큼 정교하게 교차편집해 보여준다.

여기에 헤로인 흡입-아드레날린 분비-동공 확대를 묘사한 상업광고 같은 화면을 후렴처럼 되풀이해 보여줌으로써 작품에 독특한 리듬감과 색깔을 입혔다.

크로노스 현악사중주단이 연주한 클린트 맨셀의 고전풍 소품은 신경질적인 현의 떨림을 더해가며 중독의 덫에 걸린 현대인의 운명을 애도한다. 그러나 '마약 반대'의 메시지가 너무 강렬한 나머지 현대인을 중독으로 몰고 가는 매커니즘에 대한 통찰은 상대적으로 가난해 보이는 면이 없지 않다.

“극단적 영상이 관객을 중독시키는 영화”라는 찬사와 더불어 “흥분제에 대한 영화학과 학생의 습작 같다”는 혹평을 동시에 받은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이성의 한계값 파이

아로노프스키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파이〉는 어느 천재 수학자의 이성과 광기에 관한 이야기다.

여섯 살 때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어기고 태양을 직시한 맥스 코엔(숀 굴레트)은 수학에 천부적인 머리를 지녔다.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수학의 언어가 숨어 있다는 뉴턴적인 세계관을 지닌 맥스는 세 부류의 사람과 부닥친다. 첫 번째는 그의 천재성을 주식투자에 이용해 일확천금을 노리는 무리이고, 두 번째는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에 나오는 신비의 숫자 216의 비밀을 캐려는 무리들이다. 세 번째 부류인 스승 솔은 진리의 빛을 본다는 행위 자체가 광기와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한 대목도 중복되거나 순환하지 않고 무한히 이어지는 값을 지닌 ‘파이’는 인간의 이성이 다다를 수 없는 한계를 상징한다. 초현실주의적 분위기에 공상과학과 미스터리의 요소를 배합한 이 실험적 흑백필름에서 감독은 “태양을 본다”는 은유적 행위를 통해 이성의 끝간 데를 보여주려 한다.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

(사진 : <파이>에서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 맥스는 세상 어디에나 숫자로 풀 수 있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믿으며 암호해독에 골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