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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예술영화를 나르는 항만 - 제55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지상중계
정재현 2026-02-18

로테르담국제영화제(이하 로테르담영화제)는 상업 진영 바깥의 독립영화를 유럽에 소개해왔다. 보다 정확히 명시해보면 로테르담영화제는 소위 유럽 3대 영화제가 커버하지 않는 예술영화를 유럽 전역으로 나르는 항만이다. 라브 디아스가 꾸준히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신작의 프리미어 상영을 가졌고 이강생, 켈리 라이카트 등의 감독이 장편 데뷔작 혹은 차기작을 만들었을 때 상을 안기며 주목했다. 독자들에게 친숙할 박찬옥, 박정범, 이수진 감독이 장편 데뷔작으로 경쟁부문 본상을 차지했으며 1990년대엔 아직 신인이던 홍상수, 크리스토퍼 놀런, 토드 헤인스가 로테르담의 호출을 받았다.

위 감독들이 수상한 부문은 타이거다. 영화제의 로고와 무관하지 않은 타이거는 새로운 감독, 제작자의 면면을 찾아 나서는 데에 집중하며 이들이 수상 결과를 바탕으로 차기작을 제작할 자금을 융통하는 데에 힘을 쓴다. 대상 격인 타이거상을 수상하면 상금 4만유로가 주어지는데, 이 상금은 감독과 제작자가 반드시 나누어 가져야 한다. 또 다른 장편 경쟁부문은 빅 스크린이다. 2013년 신설된 이 섹션은 대중영화부터 예술영화까지 모두를 폭넓게 포함한다. 타이거가 발굴에 집중한다면, 빅 스크린은 시장 진입에 무게를 둔다. 빅 스크린 부문은 수상작의 감독은 물론 수상작의 배급권을 확보하는 네덜란드 배급사에도 동일한 지원금을 약속하며 현지에서의 실질적인 배급을 독려한다.

지원을 아끼지 않는 영화제

<네 마음을 말해줘>

기사를 마감하는 2월5일 현재 아직 수상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제55회 로테르담영화제 경쟁부문에서 큰 두각을 드러낸 대륙은 아프리카다. 타이거에 초청된 12작품 중 총 3작품이 앙골라, 남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 왔으며 빅 스크린에서 상영된 알제리의 <디 아랍>은 <프랑수 아 오종의 이방인>과 함께 이번 영화제에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원작으로 한 서로 다른 영화로 주목받았다. 관람한 영화에 한정해 말하자면 경쟁부문 상영작 중 향후 국내외 영화제에서 두루 호감을 얻을 법한 이름은 우카시 론두다이다. 바르샤바 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이자 작가인 그는 <네 마음을 말해줘>(Tell Me What You Feel)로 로테르담을 찾았다. <네 마음을 말해줘>는 부르주아 예술가 여성 마리아와 노동계급 예술가 지망생 패트릭이 그리는 쌉쌀한 연애담이다. 패트릭과 마리아가 맺는 관계 위엔 계급, 정신 건강과 심리치료 등 밀레니얼세대가 연애를 경유할 때 짚고 넘어갈 법한 여러 논의가 교차한다. 감각적인 편집과 촬영이 돋보이는 ‘도시 멜로’지만 예술가와 정신 건강에 대해 신중하고 단호한 접근을 취하고 있어 요아킴 트리에르의 영화를 떠올리는 관객들도 많을 것이다.

방향성이 다른 투 트랙의 장편 경쟁 섹션을 안정된 제도와 (기금) 지원망 위에서 잡음 없이 수년째 굴리는 영화제의 공력은 분명 놀랍다. 문제는 두 섹션이 프로그래밍의 측면에서 큰 차이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대일 대응하는 사례는 아니겠으나 예컨대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 초청된 한국영화가 비전 부문에서 상영되어도 큰 위화감이 없는 점과 통한다. 물론 타이거는 한 감독의 장편 데뷔작부터 세 번째 영화까지로 한정한다는 출품 요건이 붙는다. 관객 입장에서는 두 섹션의 구분이 모호해 작품을 통해 경쟁부문 각각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귀납적으로 도출하기 어렵고, 창작자 입장에선 출품이 수상으로 이어졌을 때 본인에게 보다 절실한 지원 제도가 다른 쪽에 가 있다면 당혹스러울 터다.

실향영화인기금 출범 기자회견에 참석 한 모하마드 라술로프 감독, 배우 케이 트 블란쳇(왼쪽부터).

한편 로테르담영화제는 영화산업이 태동하기 어려운 국가의 필름메이커들에 대한 지원을 오랫동안 체계화했다. 1988년 출범해 그간 140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지원해온 허버트 발스 펀드가 대표적이다.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및 동유럽 일부 지역 장편영화의 초기 단계 개발을 지원하는 데에 집중하는 이 기금은 지원 대상 국가 출신의 감독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난민 지위로 거주하는 영화인들의 장편영화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올해 영화제는 허버트 발스 펀드의 새 시작을 열어젖혔다. 유엔난민기구(UNHCR)와 협업해 실향영화인기금(Displacement Film Funds)을 발족한 것이다. 5명의 실향 영화인에게 각각 10만유로의 지원금을 제공하여 독창적인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제도이며,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이끄는 선정위원회가 최종 작품을 결정한다. 첫해인 올해 <신성한 나무의 씨앗>의 모하마드 라술로프, <클론다이크>의 마리나 에르 고르바흐 등이 프로젝트의 수혜를 입었고, 이들의 작품은 올해 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가졌다.

로테르담영화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영화에도 꾸준히 창을 열어두었다. 올해 영화제 장편 경쟁부문엔 아쉽게도 한국영화가 없었다. 하지만 올해 영화제의 비경쟁부문만큼은 영화제 내내 한국인들의 활약이 회자됐다. MBC <PD수첩>팀(김종우, 김신완, 조철영 PD)이 만든 <서울의 밤>은 영화제 내내 관객과 관계자들에게 “그 영화 봤어?”의 ‘그 영화’였다. 비경쟁부문 하버에서 상영된 이 작품은 2024년 12월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저지한 국회의사당 안의 국회의원들, 그리고 국회의사당 밖의 시민들의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매 상영 기립박수가 이어졌고, 상영 이후 이어진 GV에선 혐오와 분열을 조장하는 극우정당들이 정권을 잡기 시작한 전세계 정치 흐름을 성토하는 질문들이 쇄도했다. 조소나 프로듀서에 따르면 유럽 관객들은 영화를 본 후 하나같이 “극우정당의 폭력이 이어진다면, 우리도 다음 단계는 계엄일 것이다”라며 무력감을 표했다고 한다. <서울의 밤>은 2월5일 현재 매일 순위가 공개되는 영화제 관객상 랭킹에서 굳건히 2위를 수성 중이다.

2027 RTM 피치 수상자 배채연 감독.

로테르담에 거주하는 창작진의 작품을 소개하는 RTM 섹션에서도 네덜란드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예술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설치미술을 중심으로 한국과 네덜란드를 오가며 활동 중인 시각예술가 이지 리의 <노다지랜드>, 프리랜스 예술가 정혜원의 스톱모션애니메이션 <브로큰>이 RTM에서 상영됐다. 그리고 RTM 섹션은 지역 영화 인재 육성을 장려하기 위해 2만5천유로의 제작 보조금을 건 피칭을 매년 진행한다. ‘2027 RTM 피치’의 수상자는 <하우 투 라이, 팜므, 패스>의 배채연 감독이다. 이번 RTM 섹션에서 상영한 <웰컴 투 세트>와 내년 RTM 섹션에서 월드프리미어를 가질 <하우 투 라이, 팜므, 패스>는 인공지능이 과신되는 시대를 영상으로 연구한 3부작이다. 그중 1부 <웰 컴 투 세트>는 감정 인식 패턴을 학습시키는 인공지능이 어떻게 세상의 혼란을 야기하는지를 그린다. 배채연 감독이 <씨네21>에 전해준 계획에 따르면 최종장이 될 <하우 투 라이, 팜므, 패스>는 퀴어 및 페미니스트 공동 연구자와의 협업을 통해 인공지능 산업을 향한 저항을 비안전(Unsafety) 영상으로 만들어낼 전망이다. <하우 투 라이, 팜므, 패스>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주한네덜란드대사관 국제공동제작 지원사업’에도 선정돼 내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도 상영이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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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로테르담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