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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로드리고 세희의 초소형 여행기] Thanks a lot my man.
글·사진 박 로드리고 세희(촬영감독) 2026-02-12

촬영을 맡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진행 중인 미디어아트 촬영이 있는 데다 드라마 촬영도 앞두고 있을 때였으니까. 하지만 주인공이 포크록의 전설 ‘한대수’라니! 더구나 촬영지가 뉴욕이라니! 거기에 더해 촬영하러 가자고 조르는 연출자가 현호 형이라니! 거절하기 힘든 조합이었다. 난처한 상황에 비해 오래 고민하지 않고 결정했다. 가자, 한대수 선생 만나러 뉴욕으로. 현호 형은 방송가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다큐 연출자다. 나는 그를 몽골 여행에서 우연히 만났었다. 촬영팀 막내로 첫 작품을 마치고 촬영팀 사회의 엄격한 위계와 규율에 질려 도망치듯이 떠난 여행이었다. 나는 현호 형과 한달 남짓 동고동락하며 오래된 러시아제 승합차에 실려 포장길 하나 없는 몽골의 초원과 고비사막을 덜컹거리며 누볐다. 당시 그는 조연출 딱지를 떼고 막 데뷔한 초보 연출자였다. 우리는 함께 여행하는 동안 덕담을 많이 나누며 서로의 앞날을 축원했었다. 한없이 불안하고 지독하게 경쟁이 치열한 업계에 출사표를 던진 청년들끼리 나눈 동병상련의 정이었으리라. 우리는 기차를 타고 러시아와 중국 국경도 함께 넘으며 베이징에 이르러서야 헤어졌다. 나는 티베트로 향하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각자의 전장으로 발길을 돌리며 덧없는 약속을 하나 했다. 나중에 내가 촬영감독이 되면 다큐멘터리를 함께 만들자고. 공수표에 가까운 말이었다. 흐르는 세월 속에 서로에게서 까마득히 잊혔던 것을 보면. 훗날 어렵사리 촬영감독이 되어 방송 단막극 촬영을 위해 제작사 사무실을 들락거릴 때였다. 2층짜리 단독주택을 개조한 사무실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어딘가 낯익은, 하지만 도무지 기억해낼 수 없는 누군가가 맞은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도 내게 눈길을 두고 있었으니 우리는 피하지 않고 뚫어지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기라도 통한 듯 동시에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현호 형과 10년 만에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 나는 현호 형과 종종 다큐를 만들며 세계의 이곳저곳을 누빈다. 먹고사는 일이 먼저라 의뢰받은 방송 다큐를 만들어온 현호 형이 생전 처음으로 개인 작업인 다큐영화를 만든다니, 나라도 힘을 보태주는 게 마땅했다.

나는 오랫동안 뉴욕을 동경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이룬 것도 없던 20대 시절, 마음이 가난한 내가 기댈 곳은 영화와 미술뿐이었다. 당시의 내게 뉴욕은 예술의 낙원으로 비쳐지던 곳이었고 자유가 넘실대는 약속의 땅이었다. 영화판에 청춘을 바쳤지만 비루한 내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 슬슬 배신감이 차오르던 무렵, 나는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뉴욕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서울의 가장 밑바닥에서도 이렇게 잘 버티며 살아가는데 뉴욕이라고 못 살 게 뭔가. 얼마 되지도 않는 세간과 옷가지를 정리하고, 두어 상자의 책은 부산의 본가에 보내어 방을 비웠다. 당시에는 미국에 가려면 비자를 받아야 했는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는 것을 풍문으로 익히 들었던 터였다. 나는 비자 대행 업체에 전화를 걸어 상담 요청을 했다. 요건이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의지가 아주 충만하니 어떻게든 방법을 함께 모색해보자는 마음으로. 수화기 너머의 담당자는 내게 나이, 직장, 은행 잔고 등을 물었다. 나는 수줍게 답했고 그는 내가 가진 조건으로는 절대 비자가 안 나오니 시원하게 포기하시라며 얼른 전화를 끊었다. 텅 비어도 여전히 좁고 어두운 방바닥에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선연하다. 내게 한없이 멀었던 금단의 땅 뉴욕, 나중에는 촬영 출장이며 여행을 여러 번 다녀왔지만 여전히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대는 첫사랑 같은 도시다.

내가 뉴욕을 동경하게 된 데는 어느 뉴요커 히피의 영향이 아주 크다. 그가 바로 한대수다. 한국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구적 아티스트 한대수는 정돈되지 않은 거친 발성으로 노래하는데, 듣고 있자면 어쩐지 절규 같기도 해서 무척 애절하다. 감수성 예민하고 까닭없이 시름겨워하던 젊은 시절에 무척 많이 들었었다. 또한 선생은 탁월한 에세이스트여서 책을 많이 썼는데 나는 그의 책을 빠짐없이 다 읽었다. 책에서 본 그의 인생은 기구할 정도로 굴곡이 많았으니 선생의 글을 읽으며 청춘의 고통을 견뎌내는 법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늦둥이 딸이 성인이 되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사는 게 목표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괴짜 할배 한대수. 이미 연세가 많으셔서 이번이 마지막 다큐 촬영일지도 모른다니, 더욱더 촬영에 참여하고 싶었다.

군부 정권의 압제 아래서 한대수 선생의 노래는 모두 금지곡이었고 앨범은 판매 금지돼 전량 폐기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음악을 할 수 없었던 청년 한대수는 사진사로 일하며 일생의 대부분을 뉴욕에서 보냈다. 짧게 옮기기 어려운 얄궂은 가정사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늦둥이 딸의 교육 문제로 뉴욕으로 다시 돌아갔다. 친구들과 뛰어놀지는 못할망정 경쟁하기에 급급한 한국에서는 도저히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았다고. 선생은 건강이 안 좋아 최근 몇년 사이 두번이나 응급실 신세를 졌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타고난 생기가 넘쳤다. 우리는 선생의 안내로 토박이나 알 만한 후미진 골목을 함께 걸으며 여행했다.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펍이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벼룩시장 같은 데를 다니며 노익장이 흘리는 예술혼과 철학을 카메라에 주워 담는 게 내 일이었다. 한대수 선생은 대한민국 최초의 히피이자 마지막 히피답게 무릎까지 오는 가죽 부츠를 신고 카우보이모자를 쓴 채 뉴욕 거리를 헤집으며 입버릇처럼 “Thanks a lot my man”이라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카메라 너머의 나의 슈퍼스타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선생의 집에는 평생 세계를 여행하며 사모은 기념품과 가이드북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여전히 딸과 함께 떠날 새로운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의 일생을 달래주고 창작에 영감을 더해준 것이 여행이리라. 한대수 선생이야말로 오래된 여행자구나. 몽골에서 시작된 현호 형과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뉴욕이 추가되었고, 언젠가 남극을 거쳐 ‘우주’마저 추가되기를 고대한다. 나의 오랜 여행 친구 현호 형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Thanks a lot my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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