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 내내, 겨우 들릴락 말락 한 라디오 방송이 전쟁, 외교적 실패, 자원 고갈을 보도한다. 한 인물이 말한다. “이런 게 세상의 종말이 느껴지는 방식일까?” 다른 이가 대답한다. “세상은 오래전부터 끝나고 있었어.”
<시라트>는 모로코 사막에 스피커를 쌓는 손의 클로즈업으로 문을 연다. 거대한 음향 장치의 전모를 보여주기 전, 카메라는 스피커의 케이블을 연결하고 전원을 올리는 손짓들을 신전을 쌓는 노동자의 성스러운 움직임처럼 포착한다. 사막에서의 레이브(rave) 준비는 언뜻 다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성역을 건립하는 일처럼 보인다. 이윽고 소개되는 레이버들- 스테프, 조시, 비기, 제이드, 토닌- 도 절단된 사람들의 공동체다. 팔 혹은 다리 한짝을 잃거나 몸에 흉터를 지닌 이들은 제3차 세계대전 중에도 축제를 지속하고,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거대한 트럭에 의지해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간다.
테크노음악과 약물에 몰두하는 레이빙은 궁극적으로 무아지경, 즉 육체와 정신의 해리에 닿으려는 행위다. 올리베르 락세 감독은 레이빙을 지나치게 쾌락주의적인 도피로 폄하하지도, 그렇다고 대항문화적인 유토피아로 신화화하지도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 가운데 레이브에 문외한인 중년 남성 루이스를 투입해 실종된 딸을 찾는 아버지 서사의 원형을 잔인하게 해체시킨다. 루이스가 딸을 찾기는커녕 어린 아들 에스테반마저 잃고 마는 중반 이후 영화는 전혀 다른 성질로 변모한다. 수색의 여정이 종료되고 남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존재한다는 실존적 명제(와의 긴 명상)이다.춤을 모르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 루이스에겐 아웃사이더의 매력 같은 것이라곤 없다. 그가 겪는 단장의 고통은 사막을 춤의 무대로 만들지 못하고 그저 횡단의 통로로 인식한다. 식음을 전폐한 채 쏘다니는 남자를 황무지는 환대하지도 적대하지도 않고 단지 광활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루이스가 마침내 홀로 모래 위에 쓰러질 때 과다노출로 용해되는 태양의 디졸브가 그를 삼킬 뿐이다. 존재로부터 모든 것을 탈탈 털어내는 황폐화의 수행 이후 <시라트>에는 행로마다 불시에 지뢰가 터지는 죽음의 세례가 시작된다.
이슬람 종말론에서 천국으로 가는 도중 지옥 위에 놓인 다리를 뜻하는 시라트는 단 한번의 심판이 아니다. 한 다리를 건너면 또 다른 다리가 나타나고 그다음 또 나타난다. 락세는 이 형이상학을 일련의 통과의례로 구조화한 영화를 만들었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시라트는 <시라트>에서 생과 사를 가로지르는 지뢰밭인 셈이다. 종국에 루이스와 두 레이버인 스테프, 조시만이 사막 한가운데 남아 극도의 공포와 체념으로 주저앉은 때에, 루이스는 돌연 몸을 일으켜 가뿐히 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일직선으로 나아간다. 안전한 바위 지대까지 도착한 그에게 스테프와 조시가 소리친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돌아오는 대답. “아무 생각 없이 걸었어.”
이후 한 걸음씩 떨면서 발을 내딛는 두 레이버를 지켜보는 동안 몸이 뒤틀릴 만큼 맹렬한 정동이 관객을 휘감는다. 장르적 스릴과 실존적 질문을 잔인하리만치 한데 뭉친 이 장면만으로도 <시라트>는 문제작이다. 뒤따르는 ‘누가, 어떻게 건너는가’라는 질문은 이슬람 수피즘에서 말하는 항복의 경지인 “죽기 전에 죽으라”의 실천과도 비슷하다. <시라트>는 별다른 정체성을 고수하지 않는 남자로부터 그가 지닌 아버지로서의 역할마저 소거해 깨달음의 다리를 건너게 한다. 그는 앞서 홀로 사막을 가로지를 때 이미 한번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나아가 락세의 작업은 그 자신이 속해 있기도 한 대안적 정체성인 레이버마저 하나의 갇힌 에고임을 의식하고 벗겨내는 것이다. 자비로운 신성의 증거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 영화이기에 인물들은 모든 선택지와 정체성이 고갈된 순간에 그저 앞으로 걸을 수밖에 없다. 죽음의 위치를 모른 채 삶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 낮은 신분을 받아들인 자는 어쩌다 살아남는다. 그럴 자격이 있거나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불가해한 운을 통해서다.
<레이빙>을 쓴 매켄지 워크는 “스스로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택한 레이버의 자리가 곧 또 다른 특수한 자아가 된다”고 표현했다. 요컨대 <시라트>는 비주류의 견고한 연대와 문화적 취향으로 맺어진 레이버 공동체의 작은 신전을 세운 뒤 직접 터뜨린다. <시라트>의 실험은 가혹한 것이 맞다. 영적인 영화지만 결코 영적 위안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올리베르 락세는 고통을 통한 변형과 구원이라는 쉬운 은유를 거부한다. 그러나 <시라트>가 허무주의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서사적 정당화를 거부하고 오직 맨살의 생존만 남은 이 영화의 결말이 지뢰밭의 참상보다도 더욱 급진적인 이미지에 맺힌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결정적 마지막 얼굴은 펑크 미학과 영성의 매력을 끝끝내 덜어내고 등장하는 이주민, 난민, 노동자들이다. 모리타니아 철광석 열차에 탄 주인공들은 일상적 생존의 평범한 무게를 짊어진 보통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문자 그대로의 지뢰밭, 군사화된 국경, 인간의 어떤 탄원도 받아주지 않는 우주의 무자비 앞에서 <시라트>의 일원들이- 그간 아무리 주류적 요구와 자본으로부터 추방된 삶을 살았다고 해도- 제법 풍족한 도구와 에고를 지녔었음이 분명해지는 일종의 거울 장면이다. 세 인물의 횡단이 성공하는 극적 순간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서 끝냄으로써 영화는 비로소 진술한다.
<시라트>는 20세기 초 프랑스의 모로코 식민 점령 과정에서 외인부대가 전쟁을 위해 산길을 개척하고 아틀라스산맥의 베르베르부족과 전투를 벌였던 지역에서 촬영됐다. 아마도 루이스와 레이버들의 트럭이 도착했을 것으로 보이는 모로코 밑 서사하라는 스페인의 옛 식민지로 지금까지도 모로코와 사하라아랍민주공화국(SADR)의 분쟁지역으로 남아 탈식민화 과정을 겪고 있다. 영화 속 사막은 자아의 벽 없는 감옥이면서 해소되지 않은 역사의 매립지이다. 모두가 실향민이 되어 끊임없는 엑소더스에 합류하리란 암시는 정치적으로 분명 암울한 전망이나, 천국과 지옥의 식별이 무의미해진 동시대를 전망하는 이들이라면 생과 사가 부여하는 무시무시한 평등이 어쩌면 은총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시라트>는 그렇게 상처 입은 지리를 통과하는 동안 갇힌 자기의 성역 밖으로 나아가는 존재들의 겸허한 춤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