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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지하가 현실이다, 김예솔비 평론가의 ‘오다 가오리의 지하 삼부작’
김예솔비 2026-02-11

오키나와 방언으로 석회암동굴을 뜻하는 가마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마을 주민들이 몸을 피했던 피난처이자 죽음의 장소였던 전쟁 동굴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키나와현 요미탄손에는 지비치리 가마와 시무쿠 가마가 있다. 지비치리 가마는 일본군의 강요에 의한 집단 자결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이고,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시무쿠 가마는 미군의 폭격을 피해 숨어 있던 1천여명의 주민이 생존한 장소다. 얼마 전 오키나와에 갔을 때 시무쿠 가마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두 일화를 뒤섞어서 기억하는 바람에 시무쿠 가마에서 1천여명이 죽었다고 믿은 채 그곳으로 향했다. 가마의 입구에 섰을 때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에 들어가기를 한참 망설였던 기억. 어둠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났다. 입구에서 몇 미터 못 들어간 지점에 앉아 있는데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한 손에 랜턴을 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나는 캠코더의 야간 투시 기능을 켜고 그의 동선을 따라갔다. 남자가 보는 것을 나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안고 그를 찍었지만 캠코더에 찍힌 것은 남자가 신은 운동화의 로고뿐이었다.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그 기막힌 어둠을 생각하면 여전히 그곳을 빠져나온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느낀다.

어둠의 공약불가능성

<언더그라운드>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에서 딸을 찾는 남자는 우연히 들어간 동굴에서 늙은 노파를 만난다. 그 노파는 그가 잃어버린 딸의 미래일지도 모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동굴의 안쪽에서라면 현실의 질서를 뒤집는 기이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동굴 바깥으로 빠져나온 남자의 얼굴은 마치 피안을 건너온 듯하다. 무엇이 변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동굴에 들어가기 전과 더이상 같아질 수 없다. 동굴은 외부와 분리된 시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은 모종의 정신적 연속성을 가지고 현실에 침투한다. 그러나 그 연속성은 결코 이미지의 차원에서 설명될 수 없다. <도원경>에서 동굴을 빠져나온 남자의 황망한 얼굴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현실의 언어로 해명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맞닥뜨린 영화의 난감함이기도 하다.

동굴의 안쪽에서 일어난 일은 언제나 이미지를 초과한다. 그리고 그 초과분을 수렴하는 방식으로서 ‘체험’을 강조하는 영화의 전략은 다소간 미심쩍게 남을 수밖에 없다. 오다 가오리의 <언더그라운드>에 오키나와의 가마에서 촬영한 장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려와 궁금증이 동시에 들었다. 그 어둠이 단지 한 겹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어둠 속으로 향한다는 것은 집단적 기억의 우물에 떨어지는 것처럼 끝없이 추락하는 일이라는 감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쉽사리 체험을 소구하는 충동으로부터 <언더그라운드>는 얼마나 저항할 수 있을까. 그의 전작인 <아라가네>와 <세노테>는 감독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카메라와 몸이 거의 일치된 상태에서 이미지를 촉각으로 만드는 방식을 통해 체험의 영화가 아니라 이미지의 체험이 되려 한 사례였다. 허나 <언더그라운드>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촬영된 것 같지 않았다. 그 대신 <언더그라운드>에는 30년 넘게 가마에서 유해를 수습해온 마츠나가 마츠오라는 남성이 카메라 앞에 서서 그곳에 얽힌 전쟁의 기억을 증언한다(오키나와의 가마를 다루고 있는 영화로 <언더그라운드> 이전에 제작된 <가마>가 있지만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나는 아직 <가마>를 보지 못했다. 다만 <가마>의 촬영분이 <언더그라운드>에 사용되었다는 인터뷰와 언급을 바탕으로 <언더그라운드>에 등장한 가마 장면에 대해서만 논하고자 한다). 가마에서 죽음을 맞이했거나 생존했던 사람들이 겪었던 상황이 그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진다. 그는 이야기를 마칠 때마다 “어둠 체험을 위해 잠시 불을 끄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랜턴의 조명을 끈다. 그러나 스크린을 바라보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어둠 그 자체가 아니라 순식간에 어둠으로 추락하는 이미지의 낙차다. 눈에 보이는 것은 16mm 필름 표면의 먼지와 노이즈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움직임이다. 그러니까 마쓰나가 마쓰오 씨가 ‘체험’이라고 말할 때, 여기서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라는 것이다.

<세노테>

어둠의 스펙타클에 관해서라면 <언더그라운드>는 결코 체험의 영화가 아니다. 카메라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어둠의 안쪽으로 섣불리 들어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대부분 압도적인 터널이나 지하, 어둠의 입구 앞에 고정된 채로 그 입구를 비추며 어둠 앞에서 그 인력을 참아내는 듯 멈추어 서 있다. 고모리 하루카는 “영화란 기본적으로 내가 모르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본 적 없는 세계로 거침없이 돌진해나가는 카메라워크도 가능한데, 오다 가오리의 경우에는 그런 카메라워크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필로> 46호). 오다 가오리의 카메라는 언제나 그 장소에 가 있지만, 그곳을 모험가처럼 헤집는 대신 그 장소에서 기다림을 수행한다. 한편 <언더그라운드>에서 움직이는 것은 카메라가 아니라 카메라 앞의 형상이다. 카메라의 관능을 밀어붙였던 전작들과는 달리, 이 영화에는 공간을 가로지르는 인물과 연출된 몸짓이 등장한다. 프로젝션에 투과된 빛이 움직이고, 무용수가 움직이고, 그림자가 프레임을 가로지르며, 필름의 입자들이 돌출된다. 이들은 어둠의 규모가 아니라 표면의 지속을 향해 시선을 돌리게끔 한다.

오다 가오리는 <언더그라운드>에서 “기억이 지닌 붙잡기 어려운 집단적 특성과 그것이 시간과 맺는 관계를 탐구”하려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영화에서 지하 세계의 광활함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시간’을 찍는 일이다. 지하의 시간은 지상과 다른 방식으로 흐르거나, 혹은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더그라운드>의 카메라가 극영화의 연출과 규칙을 도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아라가네>와 <세노테>에서 보여주었던 카메라의 밀착된 응시를 떠올리면 이러한 변화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반응에도 공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다 가오리가 거의 홀로 작업했던 이전작들과 달리 <언더그라운드>는 열명에 이르는 스태프가 참여한 집단 제작 시스템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있는 그대로의 지하를 포착하기보다는 지하에 잠재한 기억과 시간의 층위들을 가시화하기 위해 픽션의 장치를 끌어들인다. 이는 이 영화의 카메라가 포착하고자 하는 대상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현실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시간의 중첩을 통해서만 감지되는 기억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언더그라운드>는 오랜 시간 유해를 수습해온 마쓰나가 마쓰오의 증언과 가마 속 어둠의 체험 (불)가능성을 병치함으로써, 집단적 기억과 그 기억의 거의 (비)존재하는 상태를 동시에 감각하게 한다. 비교영화 연구자 안민하는 <횡단하는 비교영화>의 서문에서 영화 <없는 산>을 언급하며, 이 영화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기억을 대리하는 대리적 기억 활동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곧 앨리슨 랜즈버그가 말하는 보철 기억이라 할 수 있는데, 보철 기억이란 개인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역사적 사건과 타인의 고통을 영화, 박물관, 관광, 기록영상과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감각적으로 ‘장착’하게 되는 기억이다(<횡단하는 비교영화>, 5쪽). <언더그라운드>는 오키나와 전투의 집단적 기억과 전쟁의 상흔이 어둠에 새겨진 상태를 감각하게 만드는 ‘보철 기억’으로서의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기억은 관객에게 어둠을 대신 체험하게 하는 감각의 동일시가 아니라, 거리와 불가능성을 통해서만 접촉할 수 있는 기억의 상태로서 감각된다.

지하로의 투신

<아라가네>

오다 가오리의 데뷔작 <노이즈가 말하기를>은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장면을 찍는 과정에 대한 영화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 오다 가오리는 가족들에게 중대한 발표가 있다고 말한 뒤 자신의 생일날, 생일상에 모인 가족들 앞에서 커밍아웃을 한다. 가족들은 당황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장면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이 장면을 찍고 있는 카메라가 계속해서 존재감을 드러나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장면이 사실 오다 가오리가 가족들에게 대사를 주고 연출한 장면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영화는 자전적 고백의 형식을 취하지만, 점차 중심에 놓이는 것은 커밍아웃의 주체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가족들이다.

얼핏 보기에는 연출자의 내밀한 자아가 드러나는 자전적 영화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자전성은 사실 자신의 정체성과 가족의 관계를 찍기 위한 형식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커밍아웃을 연출된 상황으로 만든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갈등이 아니라 발화되지 않는 목소리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커밍아웃에 대놓고 혐오를 내비치는 부모의 거짓 반응과 연기는 커밍아웃을 둘러싼 오다 가오리와 가족의 예기 불안을 현실화한 것이다. 이 데뷔작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오다 가오리에게 ‘연출’이란 곧 인위적인 것, 작위적인 것과 등치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잠재된 불안을 (미리) 현실화해서 그 현실 이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언더그라운드>의 연출은 결코 카메라의 원초적임을 훼손하는 작위적인 손길이 아니다. 그것은 그 훼손을 일종의 예기 불안으로 현실화하여, 어둠의 표면적인 스펙터클을 걷어내고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수많은 목소리들과의 대면을 촉발하기 위한 영화적 방식이다. 그러기 위해서 오다 가오리는 지하로 향해야만 했던 것이다. 거의 투신하듯이. 거기에 놀랍거나 압도적인 광경이 있어서 그곳으로 향한 것이 아니다. 지하로 향한다는 몸짓에는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위험들을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는 삶의 조건에의 반전이 동반된다. 광산 노동자들의 노동 현장을 거의 기계와 동화된 시선으로 촬영한 <아라가네>는 촬영 당시 붕괴나 화재 등 안전사고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지겠다는 서약에 서명을 해야만 지하로 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멕시코 유카탄반도 북부에 형성되어 있는 샘의 수면 아래에서 찍은 <세노테>를 촬영하기 위해서 수영을 못했던 오다 가오리는 직접 다이빙을 배우기도 했다. 연출자의 용기나 담력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지하는 언제나 위험을 감수한 상태, 그러니까 세계의 위태로움을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시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이즈가 말할 때까지>의 자전적인 고백이라는 다큐멘터리의 한축과 지하 삼부작으로 이어지는 투신의 몸짓은 결코 별개의 것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익히 알려져 있듯 오다 가오리는 벨러 터르가 사라예보에 세운 영화학교의 수료생이다. 물론 오다 가오리의 영화적 스타일을 벨러 터르의 영향 아래서만 읽는 것은 결코 충분하지 않다. 다만 벨러 터르의 영화와 오다 가오리의 영화 사이에 한 가지 접점을 들 수 있다면, 그것은 종말론적 세계관일 것이다. <언더 그라운드>가 가마를 찍는 방식을 보면서 떠올린 것은 <토리노의 말>에서 말라버린 우물과 그 우물을 내려다보는 부감숏이다. 우물이 고갈되면서 세계는 이유 없이 멈춘다. 그 우물의 바닥은 세계의 끝이기도 한 것이다. 오다 가오리는 그 우물에 대한 일종의 존재론적 상동을 지닌 응답의 이미지로서 가마의 어둠을 찍은 것이 아닐까. 가마의 어둠은 견고하고 그곳을 넘어설 수 있는 카메라의 동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세상의 끝이고, 카메라는 그 종말을 대면한다. 바로 그 거리에서야 기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듯이.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185쪽) 아마도 내가 가마의 어둠 앞에서 느낀 현기증은 바로 이러한 기억의 현기증이었을 것이다. <언더그라운드>가 보여주는 것은 집단적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기억이 끝내 이미지로 공약될 수 없다는 사실, 다시 말해 기억의 영화적 공약불가능성이다. 이 영화는 그 기억이 언제나 어둠 속에 잔존해 있다는 상태를, 그리고 우리가 그 어둠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뒤로 한 채 투신하듯이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지화한다. 오다 가오리의 영화에서 지하로 향한다는 몸짓은 거기 잔존해 있는 것들을 끝내 밝힐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그곳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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