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여름날, 서른살을 앞둔 온다(메구)는 지하철 플랫폼에 서서 자살을 떠올린다. 어떻게 고통 없이 죽을까를 고민하는 사이 열차가 빠르게 이동하며 만들어지는 잔상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뒤이어 환영까지 본다. 수많은 문으로 둘러싸인 복도. 그중 하나의 문을 열면 온다가 살아갈 수 있는 밝은 날들이 몽타주로 펼쳐진다. 온다가 애정 어린 축하를 받고 춤을 추며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이. 환상 속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던 온다는 벅차오른 듯 눈물을 흘린다. 부드러운 조명이 점점 밝게 얼굴을 비추면, 두눈엔 눈물이 차고 입가엔 슬며시 미소가 걸린다. 절망은 설렘으로 바뀐 듯이. 가슴속에 비누 거품이 가득한 듯이.
자연스레 따라 울고 싶은, 마음에 깊이 남는 클로즈업숏을 완성한 이는 일본 태생의 모델 겸 배우 메구다. 모델 생활로 몸에 익힌 순간적인 집중력 덕분이었을까. 단편영화 <서른을 구하라>의 촬영 현장도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그가 보여준 눈물은 단 두 테이크 만에 완성됐다. “카메라와 내가 30cm 거리도 안됐다. 그런데도 감정에 빠져 눈물이 엉엉 났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메구는 공교롭게도 서른살을 앞둔 시점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30주년 기념 옴니버스영화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속 단편영화 <서른을 구하라>를 만났다. 같은 나이이기에 그가 분한 온다란 캐릭터를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그 역시 “서른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고 느끼는 중이어서다. 그가 스무살에 시작한 한국 생활은 어느덧 10년차에 접어들었다. “한국어로 오른쪽과 왼쪽도 구분하지도 못하고, 한국어를 영어만큼도 못하는 상태로 한국에 왔”지만, “어느새 10년이 지나 한국어로 연기까지 하고 있다”. 그러니 그 자신도 신기할 수밖에.
그에게 연기 인생을 열어준 영화인은 이옥섭 감독이었다. 2021년 뉴욕패션위크에서 공개된 한국의 패션 브랜드 노앙(NOHANT)의 패션필름에 여러 모델들과 함께 출연한 게 인연이 됐다. 연출자인 이옥섭, 구교환 감독을 “촬영날 하루밖에 못 만났”으며 감독과 따로 “대화할 시간도 없었”지만 메구는 눈에 들어오는 배우였던 모양이다. 이옥섭 감독은 그를 염두에 두고 단편영화 <러브빌런> 시나리오를 써서 건넸으니 말이다. <러브빌런>에서 메구 배우는 교환(구교환)과 오래 만났지만 떠나고 싶어 하는 연인을 연기했다. “뮤직비디오에 출연했을 뿐 대사가 있는 연기를 안 해봤는데도 (이옥섭 감독이) 모든 연기가 좋다고 해주셨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유연한 환경 속에서 연기할 수 있어 더욱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온다가 마주한 문처럼 <러브빌런>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가 돼주었다. “1년간 <러브빌런>으로 영화제를 다녔는데 정말 재밌었다. 영화제에선 새 아침이 오는 것처럼 매번 새로운 대화가 펼쳐진다. 너무 즐거워서 이런 세상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게다가 연기를 하면 여러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잖나. 너무 재밌을 것 같았다.”
말간 얼굴의 메구 배우는 재미란 표현을 자주 썼지만, 거기엔 순간적인 즐거움이 아닌 깊은 생각이 깔려 있었다. 모델과 배우의 차이점을 묻는 말에 “모델은 한순간의 이미지로 설득한다면, 배우는 액션부터 컷까지 시간 속에서 감정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여준다. 그 안에 한 사람의 삶과 사연이 흐르고 있다”라는 깊은 생각을 전했다. 해석과 표현이 동반한다는 점에서 “모델과 배우가 닮아 있는 직업”이라고 했지만 표현 방식과 시간의 흐름은 다르기에 그에게 두 직업은 다른 스펙트럼의 재미로 다가왔다.
이옥섭 감독과의 단편영화 작업, 2025년 공개된 노재원 배우와 함께한 단편영화 까지 이제까지 메구 배우는 주로 단편영화에 출연해왔다. 장편영화에 대한 목마름은 없을까. 이에 관해 묻자 그는 재빨리 “너무 목마르다”고 답한다. “일본인이다 보니 내 한국어가 많이 어색할 때가 있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긴 서사 속에서 한 인물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인다. 그의 바람은 “어느 영화에 나와도 그 인물로 보였으면” 하는 것. 그가 좋아하는 안도 사쿠라 배우처럼 자신도 “영화 안에서 살지만 현실 속 어딘가에 있을 것같이 느껴지”기를 꿈꿔본다. 참고로 그의 이름 메구(愛久)는 ‘영원한 사랑’이란 뜻이지만, 실은 영화를 유난히 좋아하는 어머니가 할리우드 배우 멕 라이언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니 그가 바다 건너 한국까지 와서 배우로 활동하게 된 건 영원히 영화와 사랑할 운명이었을지도!
filmography
영화
2026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
2025 <THE COLLECTION>(단편)
2022 <러브빌런>(단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