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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풍경을 변형시키기, <에스퍼의 빛>이 응답한 영화의 과제

<에스퍼의 빛>의 한 장면, 창가에 앉은 외국인 여자아이가 보인다. ‘롤라’라는 이름의 캐릭터를 창조한 TRPG 게임 플레이어의 모습이다. 때마침 뒤편에 놔둔 스마트폰에서 게임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는 알람이 울린다. 아이는 무심한 얼굴로 잠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본 뒤 다시 책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그는 접속을 거부하고 현실의 무심한 시간에 머문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순간을 포착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이 장면은 <에스퍼의 빛>에서 무척이나 미묘한 긴장을 발휘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아이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 순간 영화의 화면은 이중의 구멍으로 열리기 때문이다. <에스퍼의 빛>의 화면에는 플레이어가 지켜보는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의 풍경과 그가 현실에서 바라본 창밖의 풍경이 모두 보이지 않는다. 장면 속의 아이는 무언가에 흥미를 잃거나 무언가에 시선을 사로잡히게 되지만, 영화는 독립적으로 펼쳐진 세계의 완성된 풍경을 만날 수 없다. 그들의 지각은 카메라에 깃들지 않는다. 카메라는 단지 무언가를 바라보는 인물의 얼굴과 그 얼굴이 가려진 뒷모습을 오갈 뿐이다. 둘 사이는 너무나 멀어 보인다.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물리적으로 주어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은 왜 문제인가? 정재훈의 영화는 언제나 풍경에 휘말리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호수길>은 재개발 지역의 이층집이 파괴되는 긴 롱테이크의 풍경으로 끝난다. <환호성>은 노동하는 인간이 오가던 거리 풍경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듯한 그래픽 이미지의 삽입으로 끝난다.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는 긴 지속시간 동안 침묵하는 겨울산과 조선소의 풍경을 조각내고 재구성한다. 그의 영화는 어쩔 수 없이 풍경에 붙잡힌다. 속수무책으로 풍경에 사로잡힌 뒤 영화적 신체의 일부가 된 풍경을 다시 변형시키는 것. 이 과정에서 신체와 풍경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SF의 작동 원리와 다큐멘터리의 접근법을 동시에 감싸 안는 정재훈 영화의 주요한 논리이자 동력이다. 정재훈의 모든 영화는 한국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다시 태어난 프랑켄슈타인의 우화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새로 획득한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관한 관찰이며 기계적인 반복과 무의식적인 충동 사이를 오가는 신체에 관한 탐색이다. 풍경은 때론 영화적 신체를 증언하는 배경으로 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화적 신체를 대변하는 기관으로 전면에 나서기도 하며 정재훈이 겨냥한 영화의 핵심적인 질문을 흡수해왔다.

하지만 <에스퍼의 빛>에서 풍경은 일관된 논리로 채집되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이 영화는 스마트폰을 든 10대 청소년들을 관찰한다. 그리고 ‘자캐커뮤’의 규칙을 공유하며 TRPG 게임에 참여하는 그들의 모습은 주어진 풍경에 사로잡히는 대신 끊임없이 풍경과 어긋나고 미끄러진다. 그들은 주의를 집중해 스마트폰 장치 속에서 발생하는 게임에 몰입해 있으면서 현실에서 주어진 일상의 풍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여서 ‘롤라’가 무신경하게 스마트폰을 내버려 두는 장면처럼 TRPG 게임이 창출하는 허구적 풍경 안으로 진입하는 몰입의 체험은 순식간에 흐트러지고 훼손되기 쉽다. <에스퍼의 빛>의 화면 위에서 게임에 참여하는 그들(‘플레이어’)은 과연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 걸까? 이 영화에서 정재훈은 10대 청소년들의 내면, 혹은 머릿속의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풍경을 무너뜨린다. 현실에서 포착된 풍경과 픽션에서 조직한 풍경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게임의 주체인 청소년들의 외양을 감싼다. <에스퍼의 빛>은 10대 청소년들의 문화와 특정한 게임의 규칙을 끌어들이지만, 그것의 세부를 구체적으로 관찰하고 소묘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 대신 놀이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신체는 특정한 조건 위에서 채집되는 풍경에 진입하고 빠져나가기 위한 매개로 기능한다. <에스퍼의 빛>에서 픽션은 다큐멘터리로 향하는 매개이고 다큐멘터리는 픽션을 붙잡은 장소다. 풍경은 그 중간에 이중적으로 걸쳐 매 순간 미끄러지는 영화의 위상을 변형한다.

<에스퍼의 빛>에서 장면을 전환하는 논리는 풍경 속에 감춰져 있다. 게임은 순식간에 시작되고 끝나버린다. 이렇다 할 인과율과 연속성을 담보하지 않는 이 영화의 장면들은 지극히 평면적인 표면 위에 놓인다.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전환되는 논리가 희박한 평면 위에서 외양과 역할은 고정되지 않고 서사는 완료되지 않는다. 플레이어들이 공모하고 연출자가 종합한 게임적 세계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문화적 기호와 외형과 몸짓으로 공전한다. <에스퍼의 빛>이 방출하는 풍경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과 기억의 신호로 채워지고 현실에서 목격한 기록과 판타지 세계의 허구가 뒤섞이는 방향성 없는 시간이다. 도착지 없이 세계의 속성을 갱신하는 이 같은 감각은 플레이어들이 창조한 판타지 세계에 끝없이 거주하고픈 위로를 건네는 동시에 이곳에 영원히 거주할 수 없다는 자각으로 번진다. 그들은 게임 속의 캐릭터를 형성하지만 그 세계에 완벽하게 속할 수 없다. 그곳은 자꾸만 침범하는 현실로 열려 있고 복잡한 시간대의 문화적 기억이 틈입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에스퍼의 빛>은 자신들이 거주할 장소가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는 변형된 웨스턴이자 실패의 경험을 몸에 새기는 청소년들의 영웅 서사다.

이런 의미에서 <에스퍼의 빛>은 매우 급진적인 성장영화의 구조를 드러낸다. 연출자와 플레이어들이 공모한 이 무대에선 카메라 앞에 포착된 인물의 위상이 달라짐에 따라 그들이 조직하는 풍경과 세계가 동시에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변한다면 세계가 변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세계의 변화를 일으키는 유일한 존재이자 변화를 기억하는 마지막 증언자들이다. <에스퍼의 빛>의 픽션이 유지되는 시간은 이 명제를 집어삼키는 증언의 시간이다.

<에스퍼의 빛>에는 TRPG 게임에 참여하는 10대 청소년들을 제외하면 다른 인물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세계는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매개하는 풍경을 통해서만 채집할 수 있는 추상적인 대상으로 변모해 있다. 풍경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은 끝날 것이다. 이는 플레이어들이 공모하고 조직한 세계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환기하는 불모의 상태로 펼쳐진다. 이 장소에 불시착한 청소년들은 역설적이게도 게임 안에서 탄생과 죽음의 서사를 건설한다. <에스퍼의 빛>은 무수한 과거의 문화적 유산과 기호를 끌어들이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타고 불가능한 미래를 꿈꾼다. 주어진 세계를 폐허이자 동시에 유물로 다루는 유희적 관찰자들의 감각을 통해 풍경은 미래형의 이미지가 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일상에서 보드를 타는 ‘롤라’의 모습과 더 이상 픽션의 무대로 기능하지 않는 어느 갈대밭의 풍경을 교차한다. 게임이 끝나면 아이들의 일상적 풍경과 허구적 무대의 풍경은 다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에스퍼의 빛>은 이 독립된 풍경을 연결하고 서로를 자극하고 끝내 변형시키는 작업이었다는 것을 영화의 결말은 무심하게 웅변한다. 두 장면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영화의 끝에 그 멀어진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눈앞의 풍경을 변형하는 것, 이것이 <에스퍼의 빛>이 직면하고 응답한 영화적 과제일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우리가 지키고 되새겨야 하는 과업이 있다면, 그것은 풍경을 변형시키는 영화의 실천이었다. 새로운 영화는 동시대 감수성에 적합한 표정과 몸짓에 안착하는 대신 주어진 한국영화의 지대를 뒤틀고 오염시켜 다른 세계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시대착오적 실천에 달려 있다. 바보를 자처한 하길종의 자기파괴적 실험, 이장호가 실행한 ‘바보 선언’, 그리고 장선우의 <나쁜 영화>와 김곡의 <고갈>은 다큐멘터리적 장소 위에 과감한 픽션을 덧입혀 한국영화의 풍경을 전환한 바 있다. 바보와 어린아이들의 무지한 실천으로 한국영화는 아직 만나지 못한 풍경과 얼굴을 발명한다. 바보를 자처한 어른과 세계를 창조하는 어린아이들의 유희로 만들어진 <에스퍼의 빛>은 한국의 ‘나쁜 영화의 (비)연대기’의 끄트머리에 선다. 정재훈은 볼모의 지대에서 영화적 고아가 됨으로써 불가능한 연대기의 한 축에 기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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