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설원의 풍경이 주요 배경인 <여행과 나날>은 뜻밖에도 스탠더드 화면비로 이루어진 세계다. 물론 이 영화의 화면비 자체를 이례적이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스탠더드 비율보다는 가로 폭을 확장한 프레임이 자연의 광활함을 더 그럴듯하게 재현한다는 생각은 고정관념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정사각형에 가까운 테두리 안에서 빚어진, 혹은 그 한계가 생성하는 자연과 사람의 특수한 운동성이 이 영화의 지반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미야케 쇼는 제작 과정에서의 결단에 관해 대체로 상세히 언급하는 감독이지만, 적어도 이번 영화의 화면비에 대해서는 대답을 아낀다. 이는 다분히 직관에 근거한 선택이자(2025 서울독립영화제 마스터 클래스) “더 큰 바깥을 상상하게 만드는 작업”(<씨네21> 1535호)으로서 논리보다는 감각이 태동한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소박하게도, 야심차게도 들린다. 아마도 이 영화의 속성이 그러한 것 같다.
미야케 쇼는 영화 전반부의 극중극인 여름 편을 추동한 이미지로 바닷가의 “무너져내릴 듯한 벼랑”을 꼽은 바 있다(<필로> 47호). 그는 산세의 강렬한 존재감만이 아니라, 불시에 내려앉을 것만 같은 벼랑의 연약함에도 매료되었다고 밝힌다. 이 영화의 화면비는 우선, 그러한 절벽의 위태로움, 그 수직의 심연에 대한 인상이 얼마간 반영된 구도로 보인다. 여름 편이 원작으로 삼은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 <해변의 서경>(1967)은 <여행과 나날>보다 극단적인 각도로 그 풍경을 그린다. 파도를 맞으며 우뚝 선 절벽이 전면화된 장면에서 이를 바라보는 두 인물의 뒷모습은 프레임 한구석에 자리하거나 아래 선 끝에 겨우 걸쳐진다. 칸의 모양을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는 만화의 속성 덕분에 어떤 컷은 세로가 훨씬 긴 프레임으로 절벽의 위용을 표현하기도 한다. 영화에 비해 자유롭게 변하는 칸의 크기, 그러나 그 안에서는 운동성을 갖지 못하는 자연과 사람의 이미지로 인해 <해변의 서경>은 한층 어둡고 섬뜩한 기운을 품는다. 상대적으로 <여행과 나날>의 절벽 장면들은 자연의 위력보다는 앞서 감독이 말한 그것의 양가성에서 세계의 생기로운 흐름을 느껴보려는 것 같다. 바다를 바로 옆에 둔 벼랑의 분위기는 두 인물이 그 주위를 고요히 대화하며 걸어가는 광경으로 재현된다. 수직의 절경에 더해진 수평의 움직임을 무섭기보다는 쓸쓸하게 부감으로 응시하는 길이 미야케 쇼의 세계관에 더 닿은 방식일 것이다.
사실, <여행과 나날>에서 스탠더드 화면비의 효용과 감흥은 절벽 풍경보다는 사람을 찍을 때 빛을 발한다. 무성영화 속 인간의 얼굴이 스탠더드 화면 안에서 신체와 분리되어 클로즈업으로 되살아나는 장면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지만, 이 영화를 보는 동안 그와는 좀 다른 맥락에서 이러한 프레임이 ‘사람’의 성질을 온전히 담는 가능성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된다. 도심의 빌딩들로 빽빽한 정지된 장면이 책상 앞에 앉아 연필을 쥔 한 사람의 모습으로 이행하며 영화는 시작한다. 익명의 건물들이 숨 쉴 틈 없이 들어찬 프레임은 노트를 앞에 두고 상상에 빠진 인물의 평온한 지평으로 어느새 변모한다. 생각에 잠겨 이야기를 구상하는 시나리오작가 ‘이’(심은경)의 버스트숏은 이 영화의 화면비에 가장 편안히 안착한 장면으로 불릴 만하다. 이윽고 흰 종이와 글씨를 쓰는 이의 손에 오롯이 할애된 숏은 앞선 빌딩 숲과는 완전히 상반된 감흥으로, 미지의 잠재성으로 꿈틀거린다. 그러니 도입부에서 차분히 시도되는 숏의 전환은 실은 과격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가 <여행과 나날>의 출발지임을 다시 되새겨도 좋겠다. 한자리에 앉은 이의 미세한 고갯짓, 잠시 감았다 뜨는 눈, 잔잔하게 퍼지는 미소, 섬세한 손짓 같은 작은 움직임들은 정적인 자세와 고요한 공기, 그리고 프레임의 반경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세계 어딘가를 만지려는 열망으로 진동한다. 이의 실내 공간에서 한여름 바닷가로, 영화 속 영화(여름 편)로 들어가는 문은 그렇게 열린다. 글 쓰는 자에게 허락된 안전한 거처처럼 그의 골똘한 자태를 화면 가운데 두는 프레임의 포용력은 영화 후반, 집이 아닌 오래된 여관에 혼자 남은 이가 노트에 마침내 무언가를 적기 시작하는 동안에도 다시금 빛난다.
물론 이 영화의 프레임이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일 리는 없다. 우리는 미야케 쇼의 전작들을 경유하며 그가 ‘사람의 관계성’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감독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사람 사이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존중하고 탐색하는 일에서 장면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발견해왔다. <여행과 나날>의 스탠더드 화면비에는 그러한 문제의식 또한 흥미롭게 녹아 있다. 요컨대 겨울 편에서 이와 여관 주인이 한밤, 눈밭의 즉흥적인 여정을 감행하는 대목을 눈여겨볼 만하다. 커다란 나무통을 짊어진 여관 주인이 등장해 걷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물망을 어깨에 걸친 이가 뒤따라 나온다. 이 장면의 화면비는 설원의 너른 풍광보다는 어둠 속 희미한 불빛들을 배경으로 벌판을 천천히 가로지르는 두 사람의 형상을 위한 것이다. 이 세계의 폭은 발이 푹푹 빠지는 하얀 벌판에서 한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두 사람의 리듬과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상태로 둘이 지속하는 거리를 보존하면서 장면에 절묘한 균형을 부여한다. 우리는 카메라가 붙잡은 투숏이 아니라, 세계에 조용히 발자국을 새기며 프레임을 통과하는 투숏을 마주한 기분에 젖는다. 이러한 인상은 이들의 귀갓길에도 반복된다. 두 사람의 여정은 소동으로 끝나지만, 그 발자국의 리듬과 거리, “우리가 눈 속을 걷고 있는 풍경을 멀리서 바라보면 어떨까요?”라는 이의 말처럼 그 광경을 조망해보는 상상이 결국 영화 후반, 이의 글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백지 같은 눈밭에 흔적을 남기며 걸어가는 이의 뒷모습으로 <여행과 나날>이 끝날 때, ‘영화’는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다. 미야케 쇼는 영화로 순환하는 세계의 감각을 좇는다.
그러니 <여행과 나날>을 영화에 대한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여름 편과 겨울 편이 각각 영화 속 영화와 영화 밖 현실로 구성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글이 써지지 않는 밤, 이는 카메라를 들고 베란다로 나서지만, 때마침 집 앞을 지나간 열차의 빛과 소리의 잔상 속에서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어딘가를 물끄러미 응시하는데, 이내 스크린은 어둠에 잠식되고, 그 암흑에 뚫린 구멍에서 빛이 새어나온다. 영화가 그 빛을 쫓아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오니 세상은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다. 영화는 설원 위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레일 위를 달린다. 궁지에 빠져 헤매던 창작자의 까만 심정에 기적처럼 개안이 일어난 것만 같다. 서사적으로는 일상과 단절된 이의 여행을 예비한 장면이지만, 어둠에서 빛으로의 급진적 반전, 빛을 향한 힘찬 기동성은 <여행과 나날>의 영화적 자의식을 발산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프레임은 조리개가 열린 카메라의 시야, 빛을 뚫고 전진하는 기계의 시점숏, 그러니까 ‘영화’의 눈이다. 그것은 부드럽게 이행하고 대담하게 확장한다. 그 눈의 활동성이 열어젖힌 백색의 세상은 수많은 숏을 잠재한 하얀 스크린의 은유일 것이다. 그런데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이 대목을 주관하는 동력과 스펙터클이 그저 영화의 환영성에 대한 얄팍한 미혹에 그치지 않는다면 그건 전적으로 터널에 이르기 전, 여름 편 바닷가를 뒤흔들어버린 장면 덕분이다.
그 장면을 불러오기 전에 영화의 프레임 크기에 대한 미야케 쇼의 대답을 다시 떠올려볼 필요가 있겠다. “스탠더드 화면비는 더 큰 바깥을 상상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인터뷰의 맥락에서 이 말은 특정한 규격보다는 영화의 프레임 전반에 관한 생각으로 들림에도 여전히 <여행과 나날>에 이르는 중요한 길목이 된다. 내화면은 언제나 외화면을 함축한다는 것, 선택된 장면은 배제된 장면을 상기한다는 것, 장면의 현재성은 과거와 미래의 역학 안에 자리한다는 것, 보이는 부분은 보이지 않는 부분과의 긴장 속에 존재한다는 것, 프레임 내부에서 허구화된 세계는 그 바깥의 아직 허구화되지 않은 상태를 전제한다는 것. 그러므로 안은 밖을 어떻게 환기할 수 있을까. 비가시적인, 제어할 수 없는 밖의 에너지와 그림자를 어떻게 안의 힘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두 남녀가 해변의 풍경 속에서 바람을 맞으며 대화하는 동안 날이 저물어 이들의 형상이 어둠을 흡수한 실루엣이 되는 롱테이크 장면은 이러한 물음을 탐구한 결과일 것이다. 이 대목의 모험성은 자연의 질서와 우연을 허구의 추동력으로 모조리 흡수해 영화 가장 안쪽에 놓인 극중극이 가장 바깥쪽 대기와 접속하는 순간을 구현해낸 방식에 기인한다. 이때 프레임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그 바람에 반응하는 배우들의 몸은 어느 지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장면은 프레임의 연약함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의 범위와 영토를 넓히고 다진다. 해가 져버려 돌연 캄캄해진 화면에서 인물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돌아갈까요?” 긴 대화를 이어가던 두 사람은 그제야 프레임을 나선다. 현실의 빛을 모두 소진한 후, 혹은 그 빛이 사라진 후, 허구는 끝을 수용한다. 그 끝은 허구 바깥의 시간을 온전히 따른다.
스크린을 대면하는 동안 그것의 외부를 감각하게 된다는 감독의 문제의식이 두 남녀의 롱테이크 대화 장면에서 영화 몸체에 겸허히 구현된다면, 이보다 격렬하고 능동적인 작용으로 그 감각에 닿으려는 시도는 여름 편 후반에 단행된다. 그 후반의 저돌성을 마주하며 <여름과 나날>을 그저 관조적인 세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남녀가 재회한 바닷가에는 폭우가 몰아치는 중이다. 둘은 허름한 나무 정자에 나란히 앉아 쫄딱 젖은 채 간식을 나눠 먹고 있다. 스탠더드 프레임과 그보다 조금 작은 정자 뼈대, 이중의 울타리는 외화면에서 들이치는 것만 같은 세찬 비바람을 막지 못하지만, 인물들이 폭우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버텨주는 장막이기도 하다. 도입부에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던 이의 안정된 구도만큼은 아닐지라도, 여기서 두 사람이 머무는 사각의 정자는 4:3 화면을 올곧게 세우는 축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야케 쇼에 따르면 장면을 적시는 비는 만들어진 것이다. 달리 말해, 이 대목의 야생적 서정은 인공적인 요소들의 화학작용으로 빚어진 것이다. 인물들을 둘러싼 두개의 울타리는 견고한 허구의 틀이다.
미야케 쇼는 그 허구의 프레임을 이내 시험에 부친다. 두 사람이 나무 정자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바다로 향하더니 파도가 거칠게 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비를 흠뻑 맞으며 겁 없이 헤엄친다. 이 장면의 아슬아슬함이 생성하는 공포의 쾌감은 그 기분을 묘사하려는 언어를 초라하게 만든다. 땅에 발을 딛지 않는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카메라 역시 예측할 수 없는 파도의 움직임 속에서 출렁인다. 어떤 장면에서보다 카메라의 시점이 강렬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의 정체는 너무도 모호하다. 카메라는 인물들과의 거리를 완벽히 주관하지도, 그들을 고고히 관찰하는 우위의 자리를 점하지도 못한다. 카메라는 자신의 시야 안에 두 인물을 고정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포착했다가도 한 사람을 금세 놓쳐버리고 만다. 스탠더드 화면비에서 펼쳐진 매서운 역동성은 카메라의 무력함을 전시한다. 이 장면의 지배력은 오로지 바다의 것이다. 급변하는 날씨와 파고를 일으키는 물속에서 영화의 요소들은 적어도 움직임의 차원에서 평등하게 수동적이다. 다큐와 허구가 마찰하며 힘을 겨루는 이 장면은 정사각형에 근접한 틀로 바다의 수평면을 오려내 허구성을 강화하면서도 인물, 카메라, 프레임이 완벽히 조절할 수 없는 실재의 맹렬한 운동성으로 숏을 진행한다. 4:3 프레임은 이 지점에서 세계의 가장 불안정한 지평으로 지각변동한다. 미야케 쇼는 말하자면 카메라의 무능력으로 숏의 활력을 꾀함으로써 영화의 본질을 탐색한다. 이 지면에서 길게 언급할 내용은 아니지만, 이러한 태도와 방식은 그와 절친한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에서 프레임의 통제력과 서사에 귀속되지 않는 카메라의 역량을 노출함으로써 영화적 자의식을 표출한 경우와 사뭇 다른 것이기도 하다.
쓰게 요시하루의 <해변의 서경>은 바다에서 수영하는 남자와 우산을 쓴 여자의 뒷모습으로 끝난다. 먹구름과 비와 바다의 굴곡진 결이 새겨진 마지막 장면에서 둘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검은 형상으로 물에 몸의 대부분이 잠긴 남자와 프레임 하단에서 검은 우산에 가려진 여자는 먹색의 자연에 삼켜지기 직전인 것만 같다. 쓰게 요시하루는 이 한컷을 페이지 양면으로 확대해 이전 장면들과 구별되는 거대한 우주로 표현한다. 미야케 쇼는 만화처럼 프레임의 크기를 키우거나 자연의 풍광으로 종결하지 않는다. 대신, 여자의 얼굴로 돌아와 왠지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빛으로 화면에서 요동을 거두지 않은 채 극중극을 마무리한다. 무시무시한 스펙터클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의 헤아릴 길 없는 시선의 활동. 미야케 쇼에게 영화는 전자를 지나 결국 후자에 이르고자 하는 운동일 것이다. 여자의 얼굴은 바다에서 일렁이는 두 남녀의 광경을 스크린으로 응시하던 이의 얼굴과 공명한다. 그것은 꿈의 희열과 비감에 깊게 잠긴 ‘영화’의 얼굴이기도 하다.
미야케 쇼는 바람을 찍고 싶었다고 말했다. <여행과 나날>에서 우리가 경험한 수많은 움직임을 그 소망의 결실로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장면 하나를 마지막으로 기억해두고 싶다. 낯선 마을에 도착한 이가 바람과 눈 속에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바람에 이의 모자가 벗겨져 날아가고 그가 모자의 행로를 다급히 따라간다. 모자를 줍던 이의 몸짓은 눈밭에서 발걸음이 어긋난 듯 살짝 휘청댄다. 몸의 균형이 바람에 잠시 흔들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메라는 이 모든 동작을 저 멀리, 한자리에서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의도와 의미 없이, 그저 바람에서 시작된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의 연쇄가 하얀 화면을 간질이며 자극한다. 프레임의 외연이 조금이라도 좁거나 조금이라도 넓었다면, 이 장면의 모자는 그저 바람에 날렸다가 땅에 떨어진 평범한 물건에 불과했을 것이다. 주인의 손으로 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화면 오른쪽 선을 벗어나기 직전 낙하한 모자의 정확하고도 기특한 움직임의 감각, 모자를 프레임 안에서 움켜쥐려는 이의 일념이 신체에 일으킨 미끄러짐의 찰나는 마법처럼 세계의 공기를 바꾼다. 이들 활동의 세부가 연출의 결과인지 우연의 산물인지, 배우의 기지가 잡아챈 행운인지 카메라의 과묵함이 거머쥔 기회인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이 순간, 바람을 찍기에 이보다 아름다운 화면비를 상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