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라시 고헤이 감독은 2008년 제2회 시네마디지털서울에서 소개된 영화 <밤비 내리는 목소리>를 시작으로 각종 영화제에서 다양한 영화로 국내 관객들과 만났다. 17년 만에 정식 한국 개봉작을 갖게 된 그는 인터뷰 도중 자주 이마를 짚고 근심했다. 영화적 직관에 의해 의도적으로 비워둔 공백을 기자가 자꾸 메우려 드니 고민하는 듯 보였다. 이 경우 대개의 창작자들은 끝까지 작품의 비밀을 수호하고자 두루뭉술한 언어로 답을 뭉갠다. 한데 이가라시 고헤이는 숙고 끝에 영화에 여백을 남길 수밖에 없던 이유를, 덧셈보다 뺄셈이 필요했던 이유를 ‘전부 아니면 무’인 본인의 신념과 결부해 충실히 풀어낸다. 그는 늘 “그래 봤자 영화”라며 부담을 덜다가도 “그래도 영화”라며 연출의 무게를 통감한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슈퍼 해피 포에버>에 등장하는 모자, 담배 등 모든 오브제는 의미를 부여하자면 별것 아닌 동시에 별것이고, 영화 속 설명되지 않는 구멍 또한 그 자체로 영화의 전체를 채운다.
- 로케이션을 정해야 영화의 시나리오를 쓸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슈퍼 해피 포에버>또한 영화의 배경인 이즈, 아타미 지역을 촬영지로 확정한 후 만들어진 영화인가.
이야기에 어울리는 이미지 정도를 떠올리며 대략의 시나리오를 구상한다. 이후 그 이미지에 어울리는 장소로 떠난 후 그곳에서 아이디어를 구한다. 이를테면 길 위에서 ‘여기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라는 영감을 받는 식이다. 이에 맞춰 시나리오를 탈고하고, 촬영을 위해 다시 한번 여정에 나선다. 로케이션 헌팅을 마치고 난 다음에도 계속 공간으로부터 자극을 받는다. 영화에 대한 대략의 구상은 있지만, 장소와 이야기가 어떻게 접속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영화를 완성해간다.
- 영화를 여닫는 바다의 이미지는 초기부터 명확했나. 두 시간을 잇는 노래 또한 바다를 주요한 심상으로 사용한 곡이다.
소중한 친구가 영화 속 나기(야마모토 나이루)처럼 잠을 자던 중에 세상을 떠났다. 서핑 애호가였고, 이즈 지역을 좋아했다. 마침 나 역시 어린 시절 이즈나 아타미로 자주 놀러간 터라 바다 근처의 이야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의 큰 틀을 세웠을 무렵 우연히 방문한 선술집에서 운명처럼 가 흘러나왔다. 바다는 변치 않기 때문에 시대를 특정할 수 없다. 18세기에도 근미래에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과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은 팬데믹 전후로 급변했다.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전과 다른 생활 양상을 체화했지만 우리는 어느새 별일 없었다는 듯 살아간다. 바다라면 그 간극을, 모든 게 변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착각 중인 상태를 표현할 수 있겠다 싶었다.
-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정처 없이 유랑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우선 그 작품은 공동 연출작이었기 때문에 내 판단만으로 완성된 이야기가 아님을 전제하자. 그런데 다미앙 마니벨도 나도, 캐릭터들이 어딘가 서성이거나 어슬렁대는 영화가 많긴 하다. 왜 그럴까…. (잠시 생각하더니) 나의 관심사가 이야기에 있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캐릭터가 공간과 형성하는 관계에 관심을 두고 그때 만들어지는 감정에 집중한다. 그 감정의 축적이 결국 이야기가 된다는 주의다. 보통은 만들어진 이야기에 따라 캐릭터에게 행동반경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캐릭터의 운동에 따라 이야기가 얼마든지 새로 생성될 수 있다고 믿는다.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시간에 흥미를 느낀다고나할까.
- 전작에 이어 이번 영화 역시 프랑스에서 후반작업을 마쳤다고 아는데.
두 나라가 문화적으로 정말 다르다. 색보정이나 음향 편집에 대해 느끼는 감각도 상이하다. 일본에서 후반작업을 하면 동조압력(Peer Pressure)이 있어 아무래도 의견 조율을 가장 신경 쓴다. 그런데 해외에서 후반작업을 하면 ‘왜?’에 답해야 하는, 당연하다고 여기던 관점을 전환해야 하는 순간이 많다.
- 인물간 대화와 행동반경을 숏을 쪼개기보다 롱테이크로 담아냈다. 그렇지만 영화만이 줄 수 있는 감각을 끊임없이 환기하기 때문에 연극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는 많은 걸 설명하지 않는 이 작품의 화법과 관련이 있다. <슈퍼 해피 포에버>는 애초에 자세한 설명을 감춰둔 영화다. 그래서 관객이 내화면 바깥에 숨겨둔 이야기를 무의식적으로 상상하게 두었다. 고정된 프레임 위에서 긴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프레임 너머를 의식하게 되니까. 그래도 구체적인 표지는 영화에 박아두었는데(웃음) 2018년과 2023년, 두 시기는 분명히 점을 찍어두었다. 그 두점을 잇는 선이 없을 뿐이다. 1시간 반짜리 영화를 만들려면 뭘 더하는 것보다 빼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관객이 최대한 상상하고 예감하도록 여지를 두었다.
- 사노(사노 히로키)와 나기의 이야기는 대칭꼴로 전개되지만 그 안에서 미세한 차이를 누적한다. 반복과 차이를 주요 방법론으로 염두에 둔 채 작품을 연출했다고 봐도 될까.
현실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결국 돈이 드는 작업이라 반복을 활용해야 한정된 로케이션에서 두배의 효과를 낼 수 있다. (웃음) 제작 현실을 고려하면 프로덕션 운영의 합리성과 발상의 재미가 서로 맞아떨어지는 지점을 찾고자 한다. 같은 장소를 거쳐도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지 않나. 그건 같은 영화를 볼 때 느끼는 단순한 즐거움이다. 반복 속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것. 그 차이 안엔 스토리, 캐릭터, 감정의 변주가 있다. <슈퍼 해피 포에버>에서는 그 변화가 영화에 등장하는 파도와 같다. 파도는 언제나 출렁이지만 그 형태는 매번 다르다.
- 사노와 나기의 여행엔 우연이 연쇄적으로 틈입한다. 현장의 총책임자로서 촬영 중 우연을 허락한 순간이 있다면.
살아보니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이 전혀 없다. 영화를 직업으로 삼은 것도 다 우연이다. 아버지가 영화광이긴 하셨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축구선수였다. 축구를 정말 잘했다면 프로선수로 활약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연이 나를 이끌어 영화감독으로 만들었다. 우연은 특별한 동시에 만연하다. 그래서 필름 메이킹도 우연에 빚진다고 본다. 누구와 어떻게 현장에서 만나는지도 전부 우연이니 말이다. 우연을 부정하지 않은 채 이 요소를 어떻게 영화로 승화할지를 고민한다. 이를테면 사노가 구토하는 신에서 번개가 치는데, 번개조차 우연히 담겼다. 이미 일어난 현실을 통제한 후 영화에서 배제하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영화가, 감독이 자기 위치만 조금 바꾸면 얼마든지 우연을 껴안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