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하는 조종사의 이마를 총으로 가격하고, 감정을 주체 못해 몸을 부들부들 떨던 <굿뉴스>의 조직원 아스카를 기억하는가. 좁고 격렬한 비행기에서 내려온 배우 야마모토 나이루가 한층 가벼운 옷차림과 여유로운 얼굴로 한적한 해안 마을을 거닌다. <슈퍼 해피 포에버>에서 그가 분한 나기는 여름의 여행객이다. 친구가 함께 오지 못해 홀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아내를 떠나보낸 남자 사노(사노 히로키)를 만난다. 여행지의 바람은 혼자가 된 두 사람이 가까워지도록 불고 인연의 마술은 실패할 리 없다. <슈퍼 해피 포에버>의 12월24일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야마모토 나이루 배우를 <씨네21>이 국내 매체 중 처음으로 만났다. 대화하는 동안 그는 종종 스톱 사인을 보냈다. 이것이 나기의 감정인지, 자신의 감정인지 헷갈려서 잠시만 생각하겠다고 하던 그는 결국 분리할 수 없겠다며 웃어 보였다.
- 나기는 집에 핸드폰을 두고 오고 생일도 잊는다. 나기처럼 자주 깜빡하는 편인가.
영화를 본 친구들이 “나기는 그냥 너잖아”라고 말할 만큼 덜렁대는 면이 비슷하다.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약속 시간을 깜박하기도 한다. 현장에 몇번 핸드폰을 놓고 간 적도 있다. 하나에 몰두하면 다른 데 신경 쓰지 못해서인데 나기도 그런 것 같다.
-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나기는 기록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평소 사진을 찍거나 일기를 쓰기도 하나.
모든 걸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한다. 메모, 일기, 사진은 물론 영상을 찍기도 한다. 특별한 게 있다면 ‘이거 좋다’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 것들을 주워 온다는 점이다. 작지만 소중한 순간을 스스로 기념하는 의미랄까. 예컨대 학교나 집,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귀여운 나뭇잎이나 예쁜 돌 같은 것들이다. 이런 얘길 하면 집 안이 굉장히 아기자기할 거라고 예상하는데 실상은 잡동사니 천국이다. (웃음) 한국에 머무는 동안 집에 가져갈 무언가가 나타나길 기대하고 있다. 슈퍼마켓 비닐봉지나 깜찍한 포장지여도 충분하다.
나와 인물 사이를 바느질하듯
- 나기는 사노에게 선물받은 빨간 볼캡을 쓰고 다닌다. <굿뉴스>에서 썼던 회색 뉴스보이 캡과는 무게감이 전혀 달라서 재밌었다. 이번 작품의 합류 일화를 전해 들으니 사노의 친구 역을 맡은 미야타 요시노리 배우의 추천이 있었다고.
<슈퍼 해피 포에버>는 사노 히로키와 미야타 요시노리, 두 배우에게서 출발한 기획이다. 미야타가 빨간 모자가 잘 어울리는 나기 역에 누가 어울릴지를 한참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때 내가 영화 <달릴 수 없는 자들의 길> 시사회에서 그의 옆자리에 앉게 됐다. 당시 내 인상과 옷차림이 그가 떠올리던 나기의 분위기와 잘 맞았다고 한다.
- 빨간 모자는 사노에게서 나기에게로, 두 사람이 머무는 호텔의 베트남 직원 안(호앙 느 꾸잉)에게로 옮겨간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현재만 존재하는 것 같은 연결감을 선사하는 모자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들려준다면.
평범해 보이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실제로 손에 쥐었을 때도 어쩐지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빨간 모자는 사노와 나기가 구제 옷 가게 앞에서 줍는, 한때 주인이 있었던 헌 모자다. 영화에는 모자를 찾는 주인들의 목소리가 겹겹이 맺혀 있고, 그것은 ‘사라진 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나는 영화가 질문에 대한 답도 준다고 생각한다. 사라진 것들은 사실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영화의 순환구조를 만든다.
- 나기는 점심을 엎은 안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사노 일행과도 금세 친구가 된다. 경계심이 적고 다정한 나기의 성격은 어떻게 형성된 걸까.
살짝 풀어진 모습은 나기의 원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여행지는 평소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장소이니까. 여행지에서는 평소에 입지 않던 스타일의 옷을 입기도 하고 마음이 조금 더 열리기도 한다. 그래서 사노가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했을 때도 ‘가볼까’라는 마음이 먼저 들었을 것이다. 만약 나기와 사노가 도쿄 한복판에서 마주쳤다면 그냥 지나쳤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은 작은 우연이 쉽게 발생하는 특별한 곳에 있었고 덕분에 기적 같은 이야기도 생겨날 수 있었다.
- 나기는 글과 일러스트가 담긴 동인지를 만든다. 독립 잡지인 <EA 매거진>의 편집장이라는 배우의 이력이 반영된 설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
시나리오가 완성되기 전부터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에 관심이 있는지를 감독님에게 전부 말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EA 매거진>은 비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인터뷰 잡지다. 지금은 아쉽게도 쉬고 있다. 나보다 어린 세대에게 도움이 될 방법을 찾다가 시작했고, 첫 주제는 페미니즘이었다. 어느 업계든 남성 중심 구조인 사 속에서 여성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시키느냐에 관심이 많다. 여성 축구선수를 인터뷰했던 기억이 특히 남는다. 올림픽 같은 중요한 경기와 생리 기간이 겹칠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같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눴고, 여성들의 대화 자체가 의미 있다고 느꼈다.
- 한밤의 패밀리마트 앞에서 나기와 사노는 컵라면으로 허기를 달랜다. 사노는 카레 맛을 먹던데 나기는 어떤 맛이었나.
기본 간장 맛이었다!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촬영이 끝나고 감독님에게 왜 사노는 카레 맛이냐고 물어봤다. 분명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을 것 같아서였다. 카레는 냄새로 기억되는 맛이라며 엄마 카레, 학교급식 카레처럼 각자의 카레가 다 있을 거라고 하셨다. 아마도 두 사람에게 이 순간은 컵라면 카레 냄새로 기억될 것이다.
- 둘은 컵라면이 익기까지 3분 정도를 기다리는데 언제쯤 먹으라는 감독의 신호가 있었나. 아니면 배우들끼리 맞춘 건지 궁금했다.
감독님이 사인을 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이 장면을 찍을 때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남녀가 함께 시간을 기다린다는 상황 자체가 무척 설레는 일처럼 느껴졌다.
- 사노와 시간을 보내고 호텔 방으로 돌아온 나기는 거울 앞에서 셀피를 찍는다. 이때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정말 기뻤을 거고 좋았던 시간을 어떻게든 붙잡아두고 싶다는 마음에서 카메라를 들었을 거다. 이렇게까지 감정이 삽시간에 부풀 수 있었던 건 역시 여행지의 마법 때문이었을 거고.
- 나기가 모자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장면에서 처음엔 그가 모자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몰랐다.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더 큰 일이 생긴 줄 알았다. 어떤 감정으로 임했나.
‘어떡하지’라는 감정에 정말 깊이 빠져 연기해서 그렇게 보였나 보다. 잠깐. 지금 당신이 내게 나기의 감정에 관한 질문을 여러 번 주지 않았나. 그런데 대답할수록 묘하다. 촬영한 지 2년쯤 됐는데도 나기의 기억이 곧 내 기억 같고, 아타미시(작품의 촬영 장소)에 다녀온 야마모토 나이루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 든다. 원래도 몰입을 잘하는 편이지만 이 작품은 몰입의 정도가 남달랐다.
- 후반부 횡단보도 앞에서 재회한 나기와 사노는 함께 모자를 찾으러 나간다. 두 배우에게 장면을 온전히 맡긴 듯한 인상이었는데 실제 촬영은 어땠나.
두번 정도 찍었고, 재회한 두 사람이 앞으로 걸어간다는 것만 정해져 있었다.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갔고, 정확하진 않지만 “(모자를) 같이 찾아요”라는 대사도 사노 히로키 배우의 즉흥이었던 것 같다. 사실 이 신뿐 아니라 작품 전반에 배우들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여지가 컸다.
지속의 안녕을 바라며
- 2025년이 2주 정도 남았다.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영화처럼 12월에 새로 시작한 것이 있나. 혹은 그러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운동을 시작하고 싶다. 헬스장에 다니겠다는 생각을 이제는 정말 실천해야 할 때다.
- 연말 결산의 달이기도 하다. 올해의 영화나 책, 음악 등 2025년의 베스트를 꼽아준다면.
근사한 대답을 하고 싶은데, 올해는 어학연수에 매진하느라 최신 작품을 접하질 못했다. 런던, 세부, 아일랜드 등을 9개월간 오가며 정신이 없었는데, 오늘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차분해져 신기했다. 한국은 한국 모델 에이전시에 소속돼 몇달간 산 적이 있고, <굿뉴스> 촬영 때도 두달 정도 머물러 낯설지 않다. 한국영화를 보다가 한국이 그립다는 감정이 올라와 스스로 놀란 적도 있다. 잎이 다 떨어진 겨울의 한국을 특히 좋아하는데, 그 풍경을 잘 담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연수는 이제 2주 뒤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가면 내년 1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다루는 작품이다.
- 아직 근사한 대답을 할 기회가 남았다. ‘슈퍼 해피 포에버’는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는 주문처럼 들리기도 한다. 지금 이 주문을 빌어주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특정한 한 사람은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지구가 생긴 이래 한번도 멈춘 적 없다는 파도처럼 계속 존재해온 것들의 안녕을 빌고 싶다. 영원하다는 감각이 내게 행복과 안정감을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