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 통조림을 화폐 삼아 물건을 거래하는 시장이 형성된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자원을 바탕으로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첫 장편영화 데뷔작으로 재난영화 <콘크리트 마켓>을 연출한 홍기원 감독과의 대화는, 어떤 영화 현장은 재난 상황과 비견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여러 번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자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말이 결코 결과물에 대한 변명처럼 느껴지지 않은 것은, 영화에 그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보려 노력한 젊은 연출가의 흔적이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2015년 단편영화 <타이레놀>로 주목받은 뒤 곧바로 상업 장편영화를 연출했다. 큰 규모의 촬영 현장이 부담되진 않았는지.
타이슨이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링 위에 올라가기 전까진 모두 다 거창한 계획이 있었다고. (웃음) 사실 <콘크리트 마켓>은 처음엔 20~30분 분량의 시리즈로 기획됐던 작품인데, 제작 과정에서 좋은 기회가 생겨 장편영화로 완성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개봉까지 시간도 오래 걸렸고 그 과정에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배운 게 많았다.
- <콘크리트 마켓>의 세계관이 궁금하다. 제목의 유사성과 황궁 아파트라는 배경 때문에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연결된 영화라 생각할 관객들이 많을 것 같다.
우리 영화는 단지 같은 공간에서 진행될 뿐,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대지진 같은 재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다룬 또 다른 영화라고 봐주면 좋겠다.
- 그렇다면 <콘크리트 마켓>만이 가진 재난영화로서의 차별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게임 같은 세계관. 그리고 그 세계관을 조금 더 호의적으로 느낄 어린 관객들과 비슷한 나이대의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점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에 이렇게 10대 후반의 주인공이 있는 한국영화는 확실히 드물다. 세상이 무너진다면 당연히 원초적인 형태의 물물교환이 중요해지지 않나. 마치 게임에서 아이템을 파밍하는 것처럼 바깥세상에서 주워온 것들을 거래하는 장소가 바로 이 마켓이다. 영화 속 상황은 특수하지만, 다른 콘텐츠들을 통해 이 설정을 익숙하게 느낄 관객들이 재밌게 여길 장치들을 많이 준비했다.
- 통조림 햄을 화폐로 설정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통조림은 변하지 않는 정량과 유통기한이 그 표면에 명확히 적혀 있는 물품이다. 일단 무척 친숙한 상품이지 않나. 직관적으로 그 가치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화폐를 설정한 뒤 다른 상품들의 가격도 정할 수 있었다. 영화에 표현되진 않았지만 시장에 있는 모든 물품들의 가격표를 만들어놓기도 했다. 통조림 햄 하나가 지금의 가치로 대략 5천원 정도가 될 거라고 계산하는 등 내부적인 디테일을 구성했다. 비주얼적인 측면도 있다. 통조림이 쌓여 있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임팩트가 있다고 생각했고, 개인적으론 고층아파트의 이미지와 겹쳐 보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그 인서트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 어떤 설정은 이미지로 충분히 보여주는 반면, 영화의 배경 설명과 약간의 진행 과정 설명은 스타일리시한 텍스트 타이틀을 활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대지진의 기원을 구태여 표현하지 않은 선택이 합리적이고 기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스타일로 받아들여져서 다행이지만, 처음엔 오프닝의 배경 설명에 필요한 대지진 이미지를 대신할 용도로 시작된 것이었다. 아무래도 한정된 예산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아무리 CG에 돈을 많이 쓰고 잘 만들어봤자 관객 입장에서 여러 번 봤던 이미지와 크게 다른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물리적으로 눈에 충격을 줄 수 있는 화려한 색감의 대형 자막을 활용하게 되었고, 이걸로 광고처럼 관객들의 머릿속에 몇 가지 키워드를 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설정 설명이 약간 부족하다 싶은 구간에 같은 스타일의 자막을 활용해 극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최종적으로 아포칼립스물 분위기와 상당히 어울린 결과물이 나온 것 같다.
- 마치 영화 속 상황처럼, 한정된 자원이 가져다주는 창의력이 확실히 존재하는 듯하다.
우리 영화는 거대 자본이 투입된 텐트폴 영화가 아니기에 시작부터 다르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중 한명으로서 얘기를 하자면, 80년대 할리우드 B급 영화 부흥기 시절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 영화들 속 아이디어가 지금의 한국영화에 필요하다고 본다. 세상에 없는 새로운 걸 만들 수 없는 환경이라면, 그 조합을 새롭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콘크리트 마켓>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청소년들이 주인공인데 플롯은 범죄물이다. 처음엔 자원이 한정적인 게 아쉬웠었는데, 나중엔 오히려 그러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거대 자본이 투자되었다면 그만큼 영화의 방향성이 제한되는 부분도 생겼을 것이다. 지금의 결과물과 달리 연령대가 높은 성인 의 비중이 높아졌을 수도 있고.
- 그래서인지 주인공 희로(이재인)가 상당히 흥미로웠다. 설정상으로는 18살인데 어떤 면에선 상당히 어른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각종 경제이론에 빠삭하다.
희로는 아파트 밖 세상에서 몇년간 홀로 살아남은 인물이다. 당연히 모든 능력치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높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수험생이거나 이제 막 수능을 본 학생 관객이라면 ‘공부 잘하면 이런 세상에서도 잘 살아남을 수 있어’라는 감상을 느낄 수도 있다. (웃음)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선 감정이 없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냉철한 면이 있다. 희로는 세상이 무너지기 전부터 이미 마음이 한번 무너져본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관계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 감정이 없어서 살아남은 건지, 살아남으려다 감정이 없어진 건지 모호한 인물을 이재인 배우가 정말 훌륭하게 표현해주었다.
- 젊은 세대에 대한 희망과 긍정이 느껴지는 엔딩이 울림이 있다.
어른과 아이를 구분 짓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모두 아이다. 다만 지진의 반대 개념으로서 바뀔 생각이 없는 ‘굳어진 사람’, 자기 세계가 완성됐다고 믿는 사람들이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보고 배울 멋진 어른이 없는 세계에서, 이 찰흙 같은 아이들이 마지막에 어떤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선택하는지 잘 느껴주셨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