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건을 3번 반복하여 3개의 다른 시점을 소환한다. 성실한 영화 관객이라면 진실의 다면성을 탐구한 <라쇼몽>식 서사를 언뜻 상상할 것이다. 이때 형식이 믿는 것은 관점이다. 관점은 곧 가능성이 되어, 복잡한 이야기의 실체가 의외의 윤곽을 조금씩 드러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같은 양태를 취하는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신작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투박하게 말해 정반대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움직인다. 현대 미국은 누가 보아도, 어떻게 재구성해도 분명한 경로에 진입했다. 그 과오를 감각하기 위해 영화는 세번 재실행된다.
시카고를 포함한 미국 주요 대도시를 노린 정체불명의 핵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다. 배경에서 시계는 째깍거리는데 매뉴얼화된 단계별 제재는 보기 좋게 차례로 실패 중이다. 종국에는 그저 핵폭발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온다. 모두 약 20분간의 일이다.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의 이 암울한 타임라인을 통과하는 첫 주자는 최전선의 실무자들이다. 남편과 어린 아들에게 입 맞추고 백안관으로 출근하는 올리비아 워커 대위(레베카 페르구손), 알래스카 미사일 방어 기지에서 일하는 다니엘 곤잘레스 소령(앤서니 라모스), 워싱턴 DC 연방재난관리청 직원 캐시 로저스(모지스 잉그럼) 등이다. 태평양 어딘가에서 발사된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약 1천만명이 사망하고 또 다른 1천만명이 낙진 피해를 입으리란 전망이 확실시되자 누군가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고 누군가는 오전에 신경질을 냈던 동료를 찾아가 사과한다. 국가가 해결하리란 일말의 희망은 단 몇분 사이에 침묵 속에 가라앉는다. 관제실 스릴러의 긴장은 조금씩 직급을 타고 올라가는 모양새다. 평화주의자인 국가안보 부보좌관 제이크(게이브리얼 배소)와 앤서니 브로디 군 장교(트레이시 레츠)가 갈등하면서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진의를 따져묻거나, 게티즈버그 전투 재연 행사에 아들과 놀러간 북한 전문가 애나 박(그레타 리)에 자문하는 상황 등이 묘사된다. 영화가 한번 더 되감기를 택하면 같은 시간 국방장관 리드 베이커(재러드 해리스)와 대통령(이드리스 엘바)이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예상 사망자 수는 미국이 얼마나 종말론적인 보복 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헬기 안의 대통령은 작전 실행 코드가 빼곡히 적힌 책자를 식당 메뉴처럼 읽어주는 군 담당자와 동행하는 동안 거의 교훈적으로 보일 만큼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대규모 참사를 앞두고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가 보여주는 단 하나의 죽음도 있는데, 닥쳐오는 비극 앞에서 딸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뒤 스스로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는 국방장관의 뒷모습이다.
비글로의 신작이 첫 번째로 촉발할 논쟁은 정말로 미국이 저렇게까지 무능하냐는 힐난일 만하다. 위성이 초기 발사를 감지하지 못한 첫 번째 실수 이후, 미사일을 요격하거나 파괴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불발된다. 비글로는 사실상 핵방어시스템이 극 중 언급처럼 “총알로 총알을 막는” 확률에 가깝다고 짚는다. 당면한 상황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당혹감은 문득 영화의 구멍처럼 느껴질 정도로 텅 비어 있어 기묘한 리얼리티를 획득할 지경이다. 분노한 국방장관의 대사는 누군가에게 웃음을 안길 법도 하다. “500억달러짜리 시스템인데 고작 이렇다고요?” 미국 군사시설의 일면이 요행에 가깝다는 이 영화를 두고 특정층은 분노에 가까운 리뷰로 응답하고 있다.
두 번째로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같은 상황을 반복하는 구조를 상쇄할 만큼의 서스펜스를 구축하지 않는 영화다. 단적으로 말해 지난하다.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한계를 겨냥하는 비글로의 직접적 표명인 이번 신작은 제목부터 전개까지 그 낙담을 숨길 생각이 없다. 폭탄으로 가득한 집을 이미 그들이 지었으므로, 이제는 누구도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후반부로 향할수록 추진력을 잃는 리듬마저 작품을 관류하는 정서와 조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 캐스린 비글로의 영화는 시스템에 대한 직접적 비판 대신 냉철한 리얼리즘을 통해 권위를 확보해왔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배경으로 한 <허트 로커>(2008), 오사마 빈 라덴을 추적하는 CIA 분석가의 딜레마를 소묘한 <제로 다크 서티>(2012)는 폭력의 메커니즘에 반응하는 개인의 윤리와 전문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같은 맥락에서 비글로의 영화가 군국주의에 매혹된 경향을 지적하는 비판도 있다).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다소 동떨어진 좌표에 위치한다. 이 형식적 선택에 관해서는 비글로가 무엇을 보여주지 않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영화는 화면 밖에 예정된 수천만명의 죽음을 상정한 채 폭발의 장면을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롤런드 에머리히식 스펙터클을 거부하는 예술적 품위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종말의 이미지들과 위기의식에 과도하게 노출되어 무감각해져 있다. 끝을 보여주는 대신 끝으로 향하는 긴 시간을 구조화한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가 형성하는 감각도 비슷하다. 의도적 불발과 지연은 공포의 아드레날린마저 익숙하고 지루한 것으로 만들 뿐이다. 요컨대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핵이 ‘아직 날아오는 중인’ 공포에 무뎌지는 관객의 지각 상태가 곧 우리의 현재일 수 있음을 알려주는 영화다.
영화는 종장에서 1부의 한 장면으로 돌아간다. 영화 내내 이렇다 할 서사를 부여받지 못한 어느 젊은 군인의 절망이 마지막 파편이 된다. 기지국의 문을 열고 나와 지평선을 마주한 청년이 털썩 주저앉는다. 이 집을 짓지 않은 세대가 과오의 주체들과 함께 죽을 것이다. 같은 시간을 되감기한 것으로 모자라 최초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끝내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그 맥 빠지는 결말까지 고집스럽다. 동시에 어떤 파국의 묘사도 없이 우리가 잃게 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경고한다. 카운트다운은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