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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네가 누구든>
진영인(번역가) 사진 백종헌 2025-11-18

올리비아 개트우드 지음 한정아 옮김 비채 펴냄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면 내가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과거에 남겨진 사람처럼 되어버린다. 산타크루즈 해변 마을 팟벨리에서 엄마의 친구 베델와 함께 사는 미티의 처지도 그렇다. 테크 산업이 번창하고 부유한 엔지니어들이 곳곳에 집과 별장을 구하고 여행을 다니는 생활양식이 부상하면서 해변의 옛집은 헐리고 매끈하고 화려한 새집이 지어진다. 그렇게 동네에 단 하나 남은 허름한 집, 환풍이 잘 안되고 곰팡내가 묘하게 나며 햇빛 속에서 먼지가 춤추는 지저분한 집에서 미티가 산다. 그녀는 타코 식당에 설거지 일을 하러 나갈 때를 제외하면 거의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나이 많은 베델이 모은 20세기 중반의 여성 잡지와 원예 잡지를 탐독하고 TV 프로그램을 녹화하며 최신 기계와는 거리가 먼 세상에 머물러 있다.

그렇지만 세상의 변화가 결국 미티에게도 와닿는다. 어느 테크기업 엔지니어가 풋내기들에게 살해당했는데, 그 이유가 의식이 있는 AI 로봇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불길한 소문이 감도는 가운데 미티네 옆집에 한 커플이 이사를 온다. 부유하고 젊고 자신감 넘치는 엔지니어 남자, 그리고 성형외과 비포애프터 사진에서 애프터 사진 담당 모델을 할 법한 아름다운 여자 레나. 미티는 레나가 마치 세상을 처음 알아가는 아이처럼 순진한 질문을 던지는 모습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녀와 함께 롤러코스터를 타러 가고 해변을 산책하며 점점 가까워진다. 미티는 주름지고 피부가 늘어진 베델과 달리 크림 한 그릇처럼 곱고 매끈한 레나에게 매혹된다.

과거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에게 또 다른 외로운 사람이 다가오고 둘이 친구가 된다는, 익숙하지만 늘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 장식장에 보관된 것 같은 외모를 지닌 사람은 모두가 욕망하고 사랑한다. AI 시대에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존재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형상인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여성의 내면에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아름다운 자신의 몸이 사실은 여러 부품으로 조합된 기계라면 어쩌나, 내 몸이 나를 배신하면 어떡하나 두려워하는 마음. 혹은 내 몸에 상처를 내가면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내겠다는 욕구. 레나와 미티의 외로움은, 내가 남들과는 다른 사랑을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비롯되든 혹은 내가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점에서 비롯되든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게 세상의 미래가, 세상의 과거와 맞닿으며 서로를 구원하는 길로 나아간다.

“타인의 삶을 오랫동안 관찰해온 미티는 자신의 삶이 어딘가 잘못됐음을, 어수선하고 긴장감이 넘치며 이상한 시간에 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