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콜리> 윤문성 감독
고령 운전자의 위험성을 짚는 뉴스를 접하면서 윤문성 감독은 다른 생각을 했다. “기술적인 측면이 아닌 감정적 급발진을 다룬다면?” 여기에 10년 전 보았던, 큰 사거리에서 신호가 걸리면 내려서 담배를 피우던 능숙한 버스 기사들의 모습이 끌려나왔다. 수십년간 같은 시내버스 노선을 돌던 버스 기사 재협(박윤희)이 어느 날 경로를 이탈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느낌”을 가진 중년 남성주인공에 1순위였던 박윤희 배우를 어렵지 않게 만났지만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재협의 필수 조건은 실제 버스 운전을 위한 1종 대형면허 취득과 흡연이었다. 쉽지 않은 두 가지 모두를 첫 만남에 배우님이 선뜻 하겠다고 해주셔서 쾌재를 불렀다.” 협조해줄 버스 회사를 찾아다니고, 버스 내부라는 독특한 공간을 분석하며 촬영법을 고민하던 시간이 괴로웠을 법도 하지만 윤문성 감독은 그 시절을 행복으로 기억한다. “총 4회차. 현장 사진 한장 남길 여유도 없이 일만 했는데 정말 즐거웠다. 그토록 갖고 싶던 첫 연출작이 생겨 기쁘다.” 준비성이 철저하고 글을 빨리 쓰는 편인 윤문성은 이미 장편 시나리오 2편을 서랍 속에 품고 있다.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로 관심 있는 사회의 한 단면을 아프고 짓궂게 풀어본 작품이다. 앞으로 내 삶을 좌우했던 순간을 스크린에 담아내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
<종의 근원> 이효림 감독
<종의 근원> 촬영에 앞서 이효림 감독은 시나리오를 새로 쓰다시피 했다. “단편으로 줄이는 과정에서 공포물에 가까워졌고” 덕분에 더 두터운 개성을 얻었다. 이야기는 변함없이 폐쇄 직전의 복지원에서 일어난다. 모두가 보호 종료 나이에 도달해 떠나야 하는 시점, 피라미드 최상단의 보람(이아영)과 맨 아래층 혜인(김시연)의 관계가 비틀린다. 복지원 물색에 공을 들인 건 공간이 소녀들의 심리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평생 살아왔던 곳에 나가 세상에 던져진다는 공포와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난다는 기대감을 이미지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상징적인 동물인 달팽이를 AI를 활용해 구현하는 작업은 감독에게 색다른 영화적 재미를 안겼다. “VFX를 배운 경험을 살려 대부분 직접 작업했는데 원하던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잘 나왔다. 그래서 후반부에 적극 사용했고 이 AI 달팽이가 작품에 독특한 결을 만들어줄 것이다.” 30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한 감독은 “매체도 장르도 가리지 않고 오래오래 다작하는 것이 소망”이다. “요즘은 좋아하는 세기말을 배경으로 20대 초반 청춘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내게는 모든 영상 매체가 매력적이고, 이 영역을 계속 탐구하고 싶다는 호기심이 있다. 방향을 틀어 이 안으로 들어온 지금, 행복하다.”
<신원미상> 조희수 감독
독일 유학 시절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을 담은 조희수 감독의 관심사는 아이덴티티다. 이번 영화의 대상이 어린이로 좁혀진 건 불법체류 상태의 외국인노동자들에게 한국어 교육 봉사를 하면서부터였다. “이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출생신고조차 하기 어렵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라는 고민”으로부터 <신원미상>은 출발했다. 영화의 배경은 2050년 강력한 감시 체계 아래의 대한민국. 형사 진이(이나영)가 신원 미등록 아동들로 구성된 범죄 조직 ‘노란 양떼’의 수장 셰퍼드(이나영 1인2역)를 쫓는다. 노란 양떼라는 세계관을 만들면서 조희수는 통념적 시선에서 어린이를 해방시키는 데 주력했다. “동정이나 귀여움을 받는 존재가 아닌 주체적인 인물이길 바랐다. 같은 배경의 아이들을 취재한 기자나 연구소, 세무사 등에게 자문을 받았는데, 그분들이 공통으로 한 말이 있다. 사회적 약자가 능동적으로 행동할 때 대중의 시선이 분노로 바뀐다고.” 조희수는 삶에서 보고 배운 것들, 마음속에서 떠오른 질문을 표현하기에 영화가 가장 직접적인 언어라고 믿는다. <신원미상>을 통해 “조립자로서의 연출자” 자세를 익혔다고 말하는 그에겐 영화적 부품이 넘쳐난다. “여전히 서구권에서는 오리엔탈리즘적 프레임이 작동하고 동양인 여성은 순종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 시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정면으로 깨부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LUMP> 표국청 감독
사업화지원 모집 공고를 보는 순간, 표국청 감독은 가슴이 뛰었다. “2023년부터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찍고 싶다는 열망이 들었다.”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매만진 <LUMP>는 살인사건 피해자의 유족 수희(이채원)를 만나러 산장으로 향하는 형사 용규(조용준)에게서 출발한다. 형사가 수희를 의심하는 과정에는 감독의 오랜 고민이 녹아 있다. “영화를 쉬는 2년 동안 들었던 가장 큰 궁금증은 ‘저 사람은 왜 저럴까?’였다. 내 논리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다고 단정했는데, 그 확신이 너무 섣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통과한 성찰의 시간은 <LUMP>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 작품들과 달리 <LUMP>에서는 장르적 색을 입히려 했다. 내가 이런 분위기도 낼 수 있구나 알게 됐고, 다음엔 좀더 과감해져도 되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삶과 영화의 균형을 늘 고민한다는 그는 요즘 “관계와 침범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인류 역사상 타인과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정말 그럴까? 아마도 이 이야기는 관계라는 게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담은 영화가 될 것 같다.”
<민물고기 마음> 김윤수 감독
영화를 공부하며 문학을 사랑하게 된 김윤수 감독은 언젠가 시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시를 잘 쓰고 싶어 하는 초등학생 호영(강지용)은 그렇게 태어났다. 아버지(송철호)가 운영하는 낚시터를 찾은 시인 손님 윤철(강현우)에게 시를 배우면서 호영의 시간은 찬찬히 흘러가지만 동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소년에게 영향을 미친다. 돌아보면 사고 없이 무탈했으나 쉬운 것 하나 없는 현장이었다. “소통이 원만하지 않은 아버지와 아들이 진짜로 살 것 같은 낚시터”를 찾고, “필름 시대의 감각”을 담은 톤을 잡기까지 시간을 많이 들였다. “날씨만 좋길 바라며 시작했는데 올해 가을은 역대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 촬영은 계속 밀리고 잡아둔 저수지는 수위가 높아져 교체해야 했다.” 변수의 연속이었지만 그때마다 최선의 선택지를 찾아오는 스태프에게 한수 배우며 영화라는 공동 작업을 더 좋아하게 됐다. 고등학생 때 음악하는 친구들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영상 동아리에서 소소한 재미를 느끼던 김윤수는 자연스럽게 영화학과로 진로를 택했다. “앞으로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나는 늘 나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누군가에겐 별것 아닐지 몰라도 내게는 개인적인 경험이 가장 좋은 소재다. 먼 이야기겠지만, 언젠가 내 마지막 영화는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신진 창작자들의 첫 시사회
여주찬, 윤문성, 이효림, 조희수, 표국청, 김윤수, 강지용(왼쪽부터).
지난 11월12일, 서울 인디스페이스에서 사업화지원 감독 5인의 작품을 처음 공개하는 시사회가 열렸다. 곳곳에서 긴장한 감독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풍경이 펼쳐졌고, 시사회장 안팎의 북적임은 따뜻한 송년회를 연상케 했다. 상영에 앞서 이동하 PGK 대표가 마이크를 들었다. “새로운 일을 하면서 낯설고도 설레는 한해를 보냈다. 내년에도 현장과 신진 창작자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겠다”며 첫 사업의 소감을 전했다. 참여한 스태프와 배우, 반짝이는 재능을 발견하기 위해 달려온 산업 관계자들이 객석을 메운 가운데 인터미션 없이 5편이 상영됐다. 불이켜진 뒤 쑥스러워하며 앞으로 나온 감독들이 처음으로 큰 스크린으로 자신의 작품을 본 뒤 떠오른 생각을 전할 때마다 박수가 터져나왔다. <민물고기 마음>의 주연인 강지용 청소년 배우가 소회를 밝히자 장내의 온도는 한층 더 높아졌다. “이번 작품을 촬영하면서 연기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오늘 영화를 보니 제 실수가 보이는데요. 그래도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저를 믿고 써주신 김윤수 감독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강지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