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만남을 디즈니가 엮어준 인연이라고 요약하고 싶다. 디즈니의 IP <프레데터>의 새 시작을 알린 <프레이>를 디즈니+를 통해 공개하고, 극장용 영화 <프레데터: 죽음의 땅>을 완성시킨 댄 트랙턴버그 감독과 마찬가지로 디즈니+에서 <조명가게>를 선보인 김희원 감독이 만났다. 화상으로 진행된 대담에서 김희원 감독은 오래전 자신이 보았던 기억 속 <프레데터>(1987)를 뒤집는 새로운 세계관을 환영하며 여러 각도에서 질문을 던졌다. 트랙턴버그 감독 역시 눈 밝은 동료 연출자에게 화답하며 신이 나 설명했고, 그 과정에서 영화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신념까지 들려주었다. 두 감독의 밀도 있는 대담은 <씨네21>공식 유튜브 채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희원 반갑습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돼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아요. 영화 아주 재밌게 잘 봤습니다.
댄 트랙턴버그 영화를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영화를 세상에 공개하게 돼 설렙니다. 시사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는데 정말 기대가 되네요.
김희원 첫 번째 질문으로, 영화 속 미술이나 CG가 굉장히 독창적이고 신비로웠는데 그 모든 게 감독님의 아이디어였는지 묻고 싶어요.
댄 트랙턴버그 영화 개발 과정에서 대본을 쓰는 동안 컨셉 아티스트와 함께 디자인과 세계관을 구상하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좋아하는 컨셉 아티스트 중 한명인 안드레 월렌드가 눈 덮인 환경 속의 프레데터를 그린 그림을 보여줬습니다. 얼음이 하얀 풀잎처럼 보이기도 하는 매우 독특한 이미지였어요. 그게 영화 속 ‘면도날 풀’에 영감을 주었죠.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장면들을 스토리보드로 시각화했고, 이미지가 다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상호작용이 있었습니다.
김희원 아이디어가 많아도 아이디어를 내는 것과 화면 속에 구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잖아요. 미술팀, CG팀이 감독님의 아이디어나 작가님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데 기술적인 문제를 겪었을 것 같은데 어떤 식으로 소통해서 지금의 결과물을 만들었는지 궁금해요.
댄 트랙턴버그 잘 짚어주셨어요. 무언가를 생각해내는 것과 눈앞에 생생하게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죠. 우리는 앨릭 길리스와 훌륭하게 협업했는데요. 길리스는 첫 <프레데터>부터 스탠 윈스턴팀과 함께한 베테랑 크리처 디자이너입니다. 길리스는 세계 최고 수준의 특수효과·슈트 제작 스튜디오인 웨타 워크숍과 함께 작업했죠. 일종의 올드 스쿨과 뉴 스쿨이 결합해 덱(디미트리우스 슈스터콜로아마탕기)과 또 다른 프레데터가 착용한 슈트를 만들어냈어요. 하지만 프레데터의 얼굴은 열려 있는데요. 오픈 카울 슈트입니다. 배우 디미트리우스가 연기를 이끌어나가면 특수효과팀은 그 연기를 바탕으로 캐릭터를 시각적으로 완성시켜야 했어요. <혹성탈출>의 유인원과 <아바타>에 나오는 나비족처럼 영화에서 실제 배우의 연기와 시각효과가 결합됐는데요. <혹성탈출><아바타>속 캐릭터들은 인간형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레데터는 거대한 아래턱을 가진 괴물이고, 원래는 인간의 감정을 닮거나 표현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란 차이점이 있습니다. 아래턱 구조를 구현하는 데 많은 기술과 예술적 노력이 필요했어요. 입을 다물지 않는 구조라 배우의 섬세한 감정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김희원 그렇다면 합성 인간과 사이보그의 차이가 뭔가요? 저는 이 영화를 통해 합성 인간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는데 사이보그와 차이점이 뭔지 궁금했습니다.
댄 트랙턴버그 합성 인간, 즉 ‘신스’(Synth)는 에일리언 프랜차이즈에 등장하는 개념인데요. 초기작부터 <에이리언: 로물루스>, TV시리즈인 <에이리언: 어스>까지 신스가 등장하고, 시리즈 전반에 걸쳐 계속 등장해왔죠. 제가 생각하는 합성 인간과 사이보그의 차이는, 로봇이나 사이보그과 달리 합성 인간은 생물학과 기술이 결합된 존재란 점입니다. 그들은 장기와 혈류를 가졌으며 피는 하얗고 우유처럼 보이죠. 그 안엔 기계 구조가 섞여 있습니다.
김희원 티아(엘 패닝)하고 테사(엘 패닝) 캐릭터를 완전히 다른 인격으로 설정했는데 어째서 한 배우가 연기하는 게 좋겠다 생각했는지 궁금합니다.
댄 트랙턴버그 영화를 만들 때 늘 저만의 핵심 철학이 있는데요. ‘이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은 무엇일까?’라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 전제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장면, 사건, 순간은 무엇일까?’, ‘이 세계관에서만 가능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는 거죠. 이 영화는 합성 인간을 다루고 있고, 합성 인간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목적에 맞게 설계된 모델이란 설정을 영화적으로 잘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합성 인간들 하나하나의 외형을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한 배우에게 두 신스를 맡기는 1인2역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영화에서 ‘드론’이라 불리는 신스들은 조금 더 소모적이거나 일회용인 또 다른 종류의 모델입니다.
김희원 그 부분이 저는 이 영화의 철학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인물들이 이러저러한 군락에 따라 합성 인간으로 묶여서 등장하는데요. ‘미래에는 인간들이 다 똑같아지는 건 아닐까?’ 하는 이 영화만의 철학적인 질문을 본 것 같아요. 배우 엘 패닝이 덱의 등에 매달려 가는 아이디어를 냈다는데, 현장에서 연기할 때도 감독님하고 캐릭터에 대한 의논을 많이 했는지, 또 감독님은 배우들에게 두 캐릭터가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도록 디렉팅을 주셨는지 궁금합니다.
댄 트랙턴버그 디미트리우스와 엘과 함께 작업한 것은 정말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매우 협조적이었어요. 저는 배우들에게 즉흥연기를 자주 권하곤 합니다. 즉흥연기가 영화에 자연스러움을 주기 때문인데요, 미학적으로도 그렇지만 연기할 때도 자연스러움을 좋아합니다. 덱이 티아를 들어올려 등에 업고 불을 피워 하룻밤을 보낸 뒤 함께 길을 떠나는 장면이 있는데요. 그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여러 컷을 미리 콘티로 짜놨었어요. 왜냐하면 티아는 영화 속에서 굉장히 복잡하고 물리적·시각적인 특수효과가 필요한 캐릭터거든요. 그때 엘이 제게 한 가지를 제안했어요. “영화에서 준비한 복잡한 하네스나 와이어 장치를 쓰는 대신 그냥 몸을 늘어뜨린 상태로 서 있다가 덱이 저를 업을 때 제가 등을 맞대고 함께 걸으면 어떨까요?”라고요. 그 제안 덕분에 장면을 원테이크로 찍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고, 엘이 제안한 덕분에 탄생한 장면이죠. 그리고 이 방법이 영화에서 완벽하게 통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방법을 촬영 마지막 주에야 찾아냈습니다. (웃음) 활용할 기회가 거의 없었죠. 그래도 엘의 제안으로 영화에서 멋진 장면 중 하나가 탄생했고, 엘이 완벽하게 연기해냈습니다. 저는 협업을 정말 좋아합니다. 권위적으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언급한 장면처럼 촬영 현장에서 모두가 함께 같은 곳에 도달하는 순간을 좋아합니다. 배우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하도록 격려한 다음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면서 함께 벼려내는 과정이 많습니다. 1인2역에 대해 말씀드리면 티아는 테사보다 감정적으로 훨씬 더 단단했어요. 감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너무 달랐기 때문에 배우가 각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어요. 두 캐릭터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엘이 모드를 전환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어요.
김희원 영화 엔딩에서 테사가 탑승한 로봇하고 덱이 싸우는데, 저는 그 장면에서 인간과 기계가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요. 감정을 느끼도록 덱을 의인화한 건지 아니면 다른 영화적 의미가 있는지 궁금했어요.
댄 트랙턴버그 덱을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원작 영화 <프레데터>에서 인간 캐릭터인 더치 소령(아널드 슈워제네거)은 주변 환경을 이용해 즉흥적으로 갑옷을 만들고 싸우는데, 그 모습은 마치 프레데터의 실루엣 같습니다. 프레데터는 보통 ‘숄더 캐논’(프레데터의 어깨에 장착된 무기. 플라즈마 캐스터라고도 불린다.-편집자)을 장착하고 있는데, 덱은 행성에 도착할 때 숄더 캐논이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에 그는 행성의 생물 중 하나를 살아 있는 숄더 캐논으로 사용하죠. 이를 통해 덱이 원작 영화 속 더치 소령을 닮았으면서도 전보다 더 프레데터처럼 보이길 바랐습니다.
김희원 그래서 인간과 기계가 싸우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고 앞으로도 이렇게 기발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좋은 영화를 많이 만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이번 영화도 아주아주 잘되길 바라고 잘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댄 트랙턴버그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큰 힘이 되네요!
김희원 감독이 사랑한 캐릭터, 덱
“영화 초반 덱은 프레데터 종족 내에서도 키가 작다고 묘사돼요. 처음 볼 땐 외관도 독특하고 낯설게 느껴졌는데, 영화 막바지에는 그가 정말 멋진 남자주인공처럼 다가오더라고요. 그 점이 정말 좋았어요.”
김희원 감독이 말하는 원작과의 차이
“원작 <프레데터>는 외계의 존재가 우연히 지구에 떨어지면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어요. 우연한 사건과 우발적인 일화들이 이어지는 거죠. 하지만 <프레데터: 죽음의 땅>에서 프레데터들은 계획을 갖고 움직여요. 덱은 아버지도 두려워하는 존재인 행성 겐나의 ‘칼리스크’를 죽여 인정받으려고 하는데, 그렇게 계획하에 움직이는 모습이 인간과 똑같은 존재처럼 보였어요. 원작과 가장 다른 지점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