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하면 일어난 일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애쓴다.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신경이 쓰이고, 계속 눈에 밟히고, 결국 징크스가 되기 때문이다. 2년 전 편집장을 맡을 무렵 LoL 월드 챔피언십(이하 롤드컵) 결승이 열렸고 페이커가 왕의 길 위로 귀환했다. 전설의 현재 증명에 덩달아 취해 영화잡지 지면에 프로게이머를 향한 존경과 헌사의 말들을 쏟아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챔피언십은 매년 같은 시기 열린다. 2024년 T1의 2연속 우승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제야 비로소 1년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이후 롤드컵은 내게 ‘코끼리를 의식하지 마’가 되어버렸다. 이젠 날씨가 쌀쌀해지면 왠지 모를 초조함이 엄습한다. 어느새 롤드컵은 ‘T1과 페이커의 계절’이란 이름의 징크스가 되어버렸다.
한번 스치면 우연이고 두번 스치면 인연이지만 세번은 운명이다. 올해 롤드컵은 시작부터 긴장과 환희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이젠 본인들도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T1의 팀 컬러는 누가 뭐라 해도 ‘서커스’다. 5판 3선승 경기에서 마지막 한판까지 가는 게 당연해진 T1의 즐겜모드 덕분에 도파민이 터지지 않는 경기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서커스’란 단어는 지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승자의 언어다. 리그에서 부진해도 롤드컵만 오면 귀신같이 폼이 올라오는 T1 덕분에 아무리 아슬아슬해도 한편으론 결국 이기고야 말 거라는 믿음이 있다. 위기조차 즐거움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T1의 서사는 해피 엔딩이 예정된 영화를 닮았다.
실은 우리도 이미 안다. 이 모든 게 결과론이라는 것을. 현실 세계의 아슬아슬한 도전은 언제든 비극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소를 잃지 않고, 다음 경기를 위해 초코바를 우걱우걱 먹는 모습은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자의 모습처럼 보일 지경이다. 왕의 관록, 경험치, 가장 높은 산과 가장 긴 강이 된 초연한 존재. 뭐라고 설명하든 그 평정심, 아니 즐기는 태도는 실로 비현실적이다. 감탄과 경이의 마음으로 ‘진짜 광기’를 곁에서 슬며시 즐긴다. 페이커가 우승하는 동안은 나도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이 든다. 징크스를 가지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 어쩔 수가 없다.
미쳐야 미친다고들 한다. 무언가에 다다른,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어딘가에 미쳐 있다. 페이커의 영광이 기본값이 되어버리고 나니 “(내가 세계 최고의 원딜임을) 증명했다”는 구마유시나 “(우승했지만) 아직 뭐가 더 있을 것 같다”는 도란, 심지어 상대팀이었던 KT의 Bdd처럼 다른 선수들의 서사도 눈에 들어온다. 매혹되어 끝내 도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이번주 소개하는 이상일 감독의 <국보>나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역시 광기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 어디에 다다를 수 있는지 그 경이의 순간 곁에 슬며시 자리를 내어주는 작품들이다. 정정해야겠다. 미치지 않아도 다다를 수 있다. 설사 승리를 거머쥐지 못해도 아름다울 수 있다. 결과가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게 아니다. 지면 탈락하는 마지막 세트에서 한번도 해보지 않은 캐릭터 문도 박사를 선택하는 광기, 그 선택 자체가 찬란하다. 매번 빛나는 선택을 할 수 없을지라도, 이 위태로운 매혹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