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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필요한 건 멈출 용기, <내일의 민재> 박용재 감독, 배우 이레
이유채 2025-11-13

4등.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기록이지만 고교 육상선수 민재(이레)에겐 탐탁지 않다. 곧 있을 시 대표 선발전에 출전하려면 2등 안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 대표로 선발돼 실업팀에 입단하고 숙식을 해결하겠다는 계획이 흔들릴까 불안한 민재는 코치인 지수(금해나)에게 진위를 묻지만 돌아오는 건 받아들이라는 말뿐이다. 그사이 치고 올라오는 동료 혜림(김세원)을 보며 민재는 한순간 잘못된 선택을 한다. 이를 알게 된 코치는 사건의 은폐를 대가로 민재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불운한 상황에서 타협의 질주와 양심의 중단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내일의 민재>는 인생의 방향과 속도를 찾아가는 영화다.

지난 10월27일 개막한 제38회 도쿄국제영화제 ‘아시아의 미래’ 섹션에 초청된 박용재 감독과 이레 배우를 월드프리미어 직전 도쿄에서 만났다. 생각을 빼곡히 적은 종이 여러 장을 정독하던 신인 연출자의 긴장을, 13년차 배우가 톡톡 터뜨려주며 대화는 쏜살같이 흘러갔다.

박용재, 이레(왼쪽부터).

- 달리는 소녀의 이미지, 스포츠 비리 뉴스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했다.

박용재 러닝을 취미로 하면서 스포츠 전문가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됐다. 그들에게서 들은 체육계의 여러 문제와 현실을 영화에 녹여보고 싶다는 생각이 출발점이었다. 달리기가 내게 익숙하고 대중 친화적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육상을 염두에 뒀으나 극적 재미를 주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한 트랙에서 경합도 가능한 ‘트랙 위의 격투기’라 불리는 중거리 종목을 택했다.

- 이레 배우는 유능한 육상선수가 되어야 한다는 막중한 과제를 안고 출연을 결정했다. 혹시 감독님처럼 러너인가.

이레 그랬다면 좋았겠으나 평생 스포츠 선수를 연기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운동에 별 관심이 없었다. (웃음) 그런데 지문까지 디테일한 시나리오를 읽으며 그 속에서 생생한 민재가 되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태가 갖춰진 상태로 촬영에 들어가고 싶어서 준비를 철저히 했다. 실제 선수들과 연습하고 그들이 받는 훈련을 병행했다. 팀원으로 나오는 배우들과 함께 뛰며 트레이너에게 자세를 배우는 과정이 고되긴 했지만 끝나면 엄청난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 덕분에 체력도 좀 길렀고.

- 민재와 혜림은 예상치 못하게 친밀해지다가도 어느 시점엔 차갑게 멀어지는 기묘한 우정을 이어간다.

이레 민재와 혜림 관계에서 내가 주목한 건 둘은 라이벌이 아니라는 점이다. 민재는 혜림이 자신보다 점수가 좋다고 해서 경쟁의식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숙식과 생계가 걸린 미래 문제에 혜림이 연관되어 있으니 신경이 쓰였을 뿐이다. 민재는 주변에 휘둘리지 않는 친구다.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때부터 눈에 들어온 민재의 매력이다.

박용재 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두 소녀를 통해 인간의 다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꿈을 위해 기성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길 자청한 혜림을 통해 그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민재의 의지가 더 두드러졌으면 했다.

- 민재와 지수, 그리고 스포츠 브로커 윤호(노재원)까지 모두 기댈 혈연 없이 혼자라는 공통점을 중요하게 다룬다.

박용재 튼튼한 울타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사회적 자원과 안정적 네트워크가 없으면 삶을 스스로 책임지기 어려운 게 현실이니까. 갈수록 더 각박해지는 세계를 각자도생하는 인물들을 통해 그리고자 했다.

- 그렇지만 누구도 어떻게 혼자가 되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박용재 플래시백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 중 하나다. 앞으로 흘러가야만 하는 영화와 가끔 뒤를 돌아봐야 하는 영화가 있다면 <내일의 민재>는 전자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레 현재만 다루는데도 과거가 다 보이는 시나리오였다. 민재가 지금 처한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보여주는 행동과 의지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민재와 처음부터 가까워질 수 있었다.

- 지수는 옳지 못한 방법을 쓰더라도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돕는 자신이 민재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윤호야말로 절실한 보호자가 아닐까. 아는 아저씨가 된 윤호는 민재에게 밥 먹었냐고 물어주는 유일한 어른이다. 두 성인 캐릭터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했나.

박용재 둘 중 누가 민재를 좀먹게 하고 또 올바른 길로 이끄는지 관객이 끊임없이 헷갈리길 바랐다. 특히 윤호는 약자인지 아닌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단정할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 회색 지대의 인물이야말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캐릭터를 전형적이지 않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레 영화가 개봉하면 지수 편을 드는 관객이 더 많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민재에게 계속 달릴 기회를 만들어주는 건 지수니까. 두 어른이 제시한 길이 명확히 다르고, 그 길 끝에서 마주할 결과 또한 다를 것이다. 그래서 내가 민재라면 어느 쪽을 택할까, 민재의 절친한 친구라면 어떤 조언을 할지를 계속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읽은 기억이 난다.

- 그렇다면 지금 민재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나.

이레 잘하고 있다.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이 정답이니 지금처럼 자신을 믿어라.

- 내일의 민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상상해본다면.

이레 작중 맞닥뜨리는 일들이 민재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이자 중심 사건이 될 것이다. 시련을 벗어나기 위해 민재는 많은 걸 포기하고 그 과정에서 드물게 값진 걸 얻기도 할 것이다. 그 경험이 민재를 단단하게 만들어 삶의 파도가 두렵지 않게 해줄 거라 믿는다. 앞으로도 민재는 늘 그랬듯 소신껏 자기 인생을 살 것이다. 그토록 좋아하는 운동을 계속하면서 말이다.

박용재 일단은 졸업 뒤 실업팀에 들어갈 것이다. 이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만큼 뛰어난 성적은 거두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선수 생활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나서 지도자의 길을 걷고….

- 지금 <내일의 민재2>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는 건가. (웃음)

박용재 실제로 민재가 어떻게 성장할지를 구체적으로 써두었다. <내일의 민재>가 관객의 공감을 얻어 이후의 이야기를 이어갈 기회를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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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눈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