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종>의 냉철한 윤자유에 이어 배우 한효주가 분한 인물은 넷플릭스 시리즈 <로맨틱 어나니머스>의 이하나였다. 쇼콜라티에인 하나는 천재적인 실력과 감각을 지녔지만, 시선공포증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남들과 제대로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는 제과회사의 후계자이자 초콜릿숍 ‘르 소베르’의 대표인 소스케(오구리 슌)와 만난다. 결벽증으로 타인과의 교류에 어려움을 겪던 소스케는 이상하게도 하나와 접촉할 때만큼은 아무렇지 않고, 하나 역시 소스케의 눈을 편히 마주할 수 있다. 초콜릿에 관한 열정을 토대로 둘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한일 합작품인 <로맨틱 어나니머스>는 공개 직후 약 40개국의 시청 순위 톱10을 기록하고 일본에선 ‘오늘 일본의 톱10 시리즈’ 부문 1위에 올랐다. “모든 게 처음인 것처럼 여전히 순수하고, 응원해주고 싶은” (한효주) 매력을 지닌 하나가 숱한 상처와 실패를 딛고 나아가는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배우가 맡은 역할에 가장 가까이 섰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배우 한효주와 하나 사이엔 밀도 높은 교집합이 느껴졌다. 하나와 마찬가지로 울고 웃으며 자신이 바라던 오랜 꿈을 이루었고, 그렇게 한 단계 올라선 한효주 배우와 나눈 대화를 전한다.
- <로맨틱 어나니머스>가 한국뿐 아니라 일본 등 해외에서도 상당히 반응이 좋았다. 체감한 부분이 있다면.
일본에서 거리를 걸어다닐 때 전보다 알아보는 분들이 많고, 반가워하며 드라마 잘 보고 있다고 해주셔서 내내 신기했다. 다이칸야마의 쓰타야 서점을 무척 좋아하는데, 당시 내가 한국에서 촬영한 잡지가 한 섹션의 가운데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 풍경이 생경해서 사진을 찍고 있었더니 지나가던 다른 사람들이 내 사진을 찍더라. (웃음) 재밌고 좋은 경험이었다.
- 다른 인터뷰들을 보니 <로맨틱 어나니머스>를 준비하고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여러 차례 눈물을 보인 것 같더라. 어떤 점 때문에 감정이 움직였나.
이상하게 이 작품은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난다. 작품이 끝날 때도, 끝난 뒤에 볼 때도 울었다. 처음 편집실에서 작품을 모니터링하면서 마지막 회를 볼 땐 아예 오열했다. 오열할 만한 작품이 전혀 아닌데도 말이다. 원래는 작품이 끝나도 잘 울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첫 드라마 주연이었던 <봄의 왈츠>가 끝났을 땐데, 여러모로 아쉬운 마음이 들어 눈물이 났다. 그 뒤로는 더 강하게 스스로를 다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늘 다음 작품을 향해 달려갔다. 요즘에는 감정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내가 지금 울고 싶구나, 화가 나는구나, 슬프구나, 공허하구나, 이런 감정을 오롯이 느끼고 있고, 그러다보니 눈물이 많이 나는 듯하다. <로맨틱 어나니머스>는 시리즈물이라 촬영 기간이 길었고 그만큼 타지에 오래 머물며 외국어로 연기를 해야 했다. 일본의 촬영 환경에 녹아들어야 했기에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할 때보다 에너지가 3~4배 더 쓰였다. 온전히 이 작품을 위해 쏟아부은 나의 1년, 그럼에도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들이 작품을 보면서 복합적으로 떠올랐다.
- <로맨틱 어나니머스>의 대본 작업에도 참여했다고.
한국어 대본을 일본어로 직역하다보니 자연스럽지 않은 일본어 대사들이 있었다. 표현과 뉘앙스를 다듬기 위해서 제작자와 감독, 주연배우 등 관계자들이 모두 10번 이상 만나 회의를 거쳤다. 특히 배우들은 자신의 말투로 대사의 디테일을 많이 고쳤고, 주인공 네명이 만나는 부분부터 대본의 후반부는 거의 같이 썼다. 극에 재미를 줄 수 있는 요소에 관해서도 여러 아이디어가 오갔다.
- 한일 양측의 제작진, 배우들이 참여하는 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을 것 같다. 함께한 다른 배우들이 한효주 배우가 의견을 잘 개진하며 중심을 잡아줬다고 언급하던데.
한국과 일본의 촬영 현장을 모두 겪어봤고, 양쪽의 문화를 이해하다보니 현장에서 조율이 필요할 때 중간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있었다. 그 덕분에 나도 공부가 많이 됐고, 프로듀서 입장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도 생겼다. 단순히 배우로서만 참여했을 때보다 더 깊게 작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 하나는 일본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쓰는 인물이다. 언제, 어떤 대사를 한국어로 하고 일본어로 할지에 관한 아이디어도 직접 냈나.
소스케를 ‘싸가지’라고 부른다거나, ‘재수 없어’와 같이 즉흥적인 감정을 담아야 하는 대사는 대본에도 있었다. 그외에 하나가 혼자 있을 땐 한국어로 주로 이야기했고 현장에서 애드리브도 많이 나왔다. 일본어의 경우는 배우로 활동하는 분이 나의 일본어 선생님으로 참여해 많은 도움을 주셨다. 오래 합을 맞추다보니 “하나는 이렇게 말 안 할 것 같다”며 함께 디테일한 부분을 맞춰나갔고 그게 현장에서 큰 힘이 됐다.
- 외국어로 연기할 때 감정을 담기가 녹록지 않다는 이야기를 배우들이 종종 한다. 하나를 연기할 땐 어땠나. <서툴지만, 사랑>과 같은 일본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지만 이번 작품에선 대사 분량이 상당한데.
제일 처음 일본에 갔을 때가 20여년 전 <봄의 왈츠>프로모션 때문이었다. 그때 이후로 일본 드라마와 영화들을 접하면서 일본에서도 연기를 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20대 초반부터 틈틈이 시간을 내 일본어 공부를 해왔고 일본영화도 찍었다. 일본 매니지먼트인 ‘FLaMme’에 소속된 지도 15년이 됐다. 그런 시간이 바탕이 됐기에 <로맨틱 어나니머스>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일본어를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다면 하나를 지금처럼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냥 외워서 할 수 있는 양이 아니고, 그게 가능했을지라도 각 표현의 뉘앙스를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시간들이 내게 좋은 발판이 됐다.
- 하나는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밝음을 잃지 않는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겐지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아이린(나카무라 유리)에게 상담을 요청할 때, 하나가 한 말이 있다. 지금까지 혼자서도 괜찮다고 여기며 살 수 있었던 건 사실 완전한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그만큼 가족처럼 자신을 돕고 바라봐주는 선생님이 있었고 나중엔 쇼스케도 등장한다. 그런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살아갈 힘이 나지 않나. 게다가 본인이 정말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게 큰 위안이자 살아갈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 하나는 시선공포증 때문에 사람들과 대화할 때 긴장한다는 게 온몸에서 느껴졌다.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때가 잦다보니, 표정 외에 비언어적인 표현에도 신경을 썼다는 인상이다.
일본에서 정신과 의사 선생님과 면담하며 시선공포증에 관한 설명을 듣고 관련 영상 자료를 참고했다. 사실 내게도 일종의 주목공포증이 있다. 제작발표회나 시상식 같은 큰 행사에서 의상을 갖춰 입고 무대 위에 서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 순간 눈앞이 하얘지고 패닉이 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다른 분들도 남들 앞에 설 때 일상에서 그런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하나가 시선공포증으로 인해 느끼는 불안은 우리의 삶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청자들이 작품을 보며 공감할 수 있도록 연기하려 했고 감독님과도 대화를 많이 나눴다.
- 하나의 외형에 관해선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나. 시선을 피해야 할 땐 주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는 편이고, 화장기 없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하나는 옷에 관심도 많은 인물이다. 옷은 주로 인터넷 쇼핑을 해서 입는데, 남의 눈에 띄고 싶지 않다보니 결국 나갈 땐 무채색 옷만 입게 된다. 그래서 그렇지 패션 센스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밖에 나갈 일이 없다보니 메이크업도 잘 하지 않는 것이다. 헤어스타일에 관한 아이디어는 내가 냈다. 앞머리를 내리고 헤어에 층을 많이 둬서 필요할 때 곧바로 시선을 가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 천재 쇼콜라티에인 하나가 초콜릿을 제조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손놀림이 익숙해 미리 배운 시간이 적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
가와지라는 유명한 쇼콜라티에가 <로맨틱 어나니머스>의 초콜릿 작업을 담당해주셨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그분에게 직접 배웠다. 한번은 작품에 나온 와사비 앙 소와 초콜릿을 만들어주셨는데 공교롭게도 그날이 밸런타인데이였다. 모두가 맛있게 나눠 먹은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겐지 선생님이 와사비 앙 소와 초콜릿이 하나 같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먹으면서 그 이야기에 다시금 공감했다. 그 밖에도 극 중 하나가 만든 퓨어 겐지 초콜릿의 맛이 정말 깊었다.
- 극 후반부에 치러진 ‘월드 쇼콜라티에 마스터스’ 경연대회에선 무대 위에 오른 하나의 모습이 전과 달랐다. 마지막까지 도망치지 않고 해야 할 말을 모두 전했다.
그 신은 순서상으로도 도쿄에서 찍는 거의 마지막 신이었다. 그 장면에서 하나의 대사를 다시 썼는데, 원래 대사를 많이 고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대본에 쓰인 그대로 표현하려는 편인데 이번에는 그렇게 되더라. 그 시점에선 내가 하나에게 깊이 동화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가 전달하려는 말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 하나의 톤을 유지하고자 감독님과 상의하면서 대사를 수정했다. 초콜릿을 만드는 일이 너무 행복하고 이 일을 통해 자신이 구원받았다, 그러니 초콜릿을 드시는 다른 분들도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는 하나의 말은 결국 내가 <로맨틱 어나니머스>에 임하는 마음이었다. 이 드라마를 보는 분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의 위로를 받고 기분이 좋아질 수 있길 바랐다. 그런 바람을 갖고 내 전부를 온전히 쏟아부으며 연기했다.
- 하나에게 상당히 깊게 감정이입했던 것 같다.
모든 캐릭터에 이렇게 임하진 않는다. 그런데 하나는 유독 연기를 한다는 감각으로 접근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 부분은 이렇게 표현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을 어느 순간부터 하지 않은 채 연기하고 있더라. 쉬는 날에도 항상 하나를 생각하고, 하나의 대사를 준비하며 지내다보니 자연스럽게 하나와 동화됐다.
- 드라마 <무빙><지배종>, 영화 <독전2>등 최근 출연작마다 상반된 모습을 보여줬다. <로맨틱 어나니머스>의 하나 또한 한효주 배우의 지난 필모그래피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얼굴이었다.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아 배우에게도 색다르게 와닿았을 것 같은데.
<로맨틱 어나니머스>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가 배우로서 꿈꿔온 일이 마침내 이뤄진 작품이다. 한국 배우로서 일본어로 연기를 하는 것이니 한국에 사는 교민들도 좋아해주시길 바랐다.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랐는데 그런 반응들이 많아 보람차다. 하루아침에 뭔가를 이뤄낸 것이 아닌, 오랜 시간 공들여 조금씩 천천히 해온 것이 마침내 결실을 이룬 경우라 성취감이 크다.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다음에 또 일본에서 촬영을 하게 된다 해도 그땐 또 다른 마음일 것이다. 뿌듯한 동시에 허전함도 뒤따르는데, 이 두 가지 마음을 잘 정리하는 것이 내게 남은 과제다.
-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배우로서 <로맨틱 어나니머스>를 소개하는 동시에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올해 경쟁부문이 신설됐고, 초대 심사위원이라 의미가 남달랐을 듯하다.
정말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부담도 됐지만 결과적으로 정말 즐거웠다. 내가 목격하는 상황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정말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토론을 전부 다 녹음해서 영화로 쓰고 싶을 만큼. 그런 이야기도 했다. 이 멤버 그대로 영화를 찍자. 너무 재밌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7명의 심사위원을 주인공으로 은연중에 시놉시스를 쓰고 있더라. 그 정도로 누구 하나 캐릭터가 겹치질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느낀 건 좋은 영화와 좋은 이야기의 기준은 무엇인가, 어떻게 심사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이 첫 결과로 부산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의 방향성이 정해지기 때문에 부담이 됐고, 그래서 더 치열하게 토론했다. 무엇이 좋은 영화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리진 못했지만, 한 가지 크게 느낀 것이 있다. 좋은 영화는 다들 똑같이 좋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말로 표현하긴 어려워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게 있나보다. 정말 원 없이 영화를 보고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이 시간이 행복했다.
- 또 어떤 작품에서 한효주 배우를 만날 수 있을까. 두달도 채 남지 않은 올해를 어떻게 마무리하고 싶은지도 같이 들려준다면.
<무빙> 시즌2 제작이 확정돼 내년부터 촬영에 들어갈 것 같다. 최근까지 <로맨틱 어나니머스>를 홍보하며 느꼈는데 내가 이 작품을 아직도 많이 쥐고 있더라. 건강한 마음으로 잘 떠나보내주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