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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의 해상도를 높이면] 아무도 읽지 않은 편지 <연의 편지> <셰계의 주인>
이자연 2025-11-13

<연의 편지>

편지의 운명은 발신자가 정할까, 수신자가 정할까. 편지란 태생적으로 일단 쓰여져야 존재 목적이 생겨난다는 점에서 발신인의 의지가 중요하지만, 편지의 대상에게 최종적으로 도달해야만 과업을 완수하기에 수신자로의 당도가 필수적이다. 폐문부재 앞에서 편지가 무력해지는 것도 아무리 그것의 목적성이 뚜렷할지라도 원래 전달되었어야 하는 수신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주인>에서 (사실상 쪽지인) 편지는 작자미상으로부터 쓰여졌다. 책상 주변에서 툭 떨어진 편지. “너, 그 정도로 멍청했냐? 아니면 관심받고 싶었냐?” 주인(서수빈)이 편지를 펼치자 일순간 모든 소리가 작게 잦아들더니 웅성거리는 공명만이 장면을 채운다. 그리고 난처한 주인이의 표정. 카메라가 흔들리는 것도 아닌데 마치 땅이 하늘로 뒤집어지는 듯한 얕은 어지럼증마저 느껴진다. 도대체 이 편지에 담긴 모난 미움은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 관객은 주인공의 시선으로 영화를 따라가기 때문에 편지를 일종의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충분하다. 하지만 <세계의 주인>은 얼굴 없는 발신자를 음침한 악인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타임라인으로 보면 이 편지는 성폭력 피해를 장난처럼 포장했던 주인이의 (누군가에겐 철없어 보일 수 있는) 행동 이후에 전달된다. 관객이 동의하지 않는 주인공의 태도에 영화는 편지가 아예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라는, 혹은 ‘누군가’를 대신해서 쓴소리를 전한 거라는 의도를 품는다. 따라서 그간 쉽게 밝히지 않았던 비밀을 중후반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고백하는 영화는 편지를 통해 관객에게 중립적 태도를 먼저 이끌어낸다. 구조적으로 영화의 이해에 필요한 밑바탕부터 마련하는 것이다. <연의 편지>또한 익명의 편지로 시작한다. 이전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해 할머니가 계신 시골 마을로 이사 온 소리는 어쩐지 친구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부적응의 고통을 짊어지던 어느 날, 책상 서랍에서 편지 한통을 발견한다. 마법 같기도, 동화 같기도 한 편지는 소리를 계속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다. 교실 안에 꽁꽁 갇혀 있던 그는 편지의 손길을 따라 옥상으로, 유리 온실로, 운동장으로, 학교 뒤편의 아지트로 향하며 동심원을 넓힌다. <세계의 주인>의 반복되는 편지가 주인이를 자꾸만 얼게 만든다면, <연의 편지>는 얼었던 마음을 녹이며 수신자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편지가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세계의 주인>

최종적으로 <세계의 주인>은 편지의 발신자를 밝히지 않는다. <연의 편지>또한 발신자 호연의 에피소드를 가장 마지막으로 배치함으로써 가장 늦은 정보로 다룬다. 이에 따라 두 영화 속 편지는 그 운명이 발신자가 아닌, 수신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수신자의 주요 행위, 편지를 받아서 읽는다는 것은 어떤 함의를 지닐까. 정확히는 문자, DM, 메일 등 디지털 텍스트가 아니라 손으로 쓰이고 접힌 편지를 읽는 행위는 어떤 자극을 불러일으킬까. 편지 수신은 겉으로 보기에 수동적이다. 물체가 알아서 도착하면 그제야 수신자가 뒤늦게 받아 드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서신을 여는 순간 복잡해진다. 너무나 선명하게 감정으로 남아 있는 글들을 발신자의 입장으로 성실히 해독하는, 강제적으로 능동적이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내용을 읽고 나면 수신자는 상호 반응할 수 없는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에 덩그러니 남고 만다. 즉각적인 응답은 요원하고, 오직 감정을 뒤집어쓴 ‘나’만이 놓이는 것이다. 이 편지는 수용될 것인가 말 것인가, 존재 목적은 보존되는가. 그 운명은 결국 수신자가 결정한다. <세계의 주인>의 주인이는 엄마를 대신해 집을 쓸고 닦고, 혼자 아빠를 만나고 돌아오는 동생에게 의젓하게 조언할 정도로 성숙하다. 정확히는 성숙해져야만 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CCTV마냥 자신을 관찰하고 부정성을 쏟아내는 편지 앞에서, 더구나 누구에게도 쉽게 의논할 수 없는 고립된 상황 속에서 주인은 평소와 달리 충동적으로 교실을 떠난다. 동요된 마음과 함께 편지는 수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주인이의 아빠에게도 마찬가지다. 여러 차례 문자를 보내도 회신 없는 아빠는, 주인이의 서신을 끝내 수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에는 모두 두 번째 편지가 등장한다. 지금까지 받아온 것들과는 많이 다른 온도의 편지가. 주인이는 동생 해인이(이재희)의 방구석에서 편지 한 무더기를 발견한다. 주인이와 그의 가족을 무너뜨린 삼촌으로부터 온 편지와 아직 미완성인 해인의 답장이다. 채 다 쓰이지 않은 편지는 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누나에게 편지 보내지 마세요.” 정확히 이 편지는 주인이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사이에 잠시간 불시착하여 결국 주인이의 손에 가닿았다. 이제 수신자는 주인이다. 그리고 그것을 못 본 척하며 평소와 같이 웃는 어린 여자아이. 아무리 세차장을 반복해 통과하고 연대하는 동료들과 청소 봉사를 하면서도 세탁되지 않던 것은 결국 오배송된 편지 한통으로 제힘을 되찾는다. 여전히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없고 그것을 읽어버린 자신만이 고독히 남아 있지만, 그렇기에 회복한다. 오직 혼자서 곱씹고, 혼자서 편지에 담긴 것을 해석할 수 있어 회복한다. <연의 편지>의 소리는 그동안 침묵했던 편지 한통을 뒤늦게 전달받는다.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지민으로부터 온 것이다. 자신을 돕다가 따돌림에 휩쓸려버리고 만 소리의 사정을 알지만 그로부터 도망쳐버린 지민의 늦은 편지는 말한다. 전학 간 학교에서 평온히 지낼 수 있었지만, 괴롭힘당하는 친구를 보고 네가 떠올라서 용기를 냈다고. 딱 네가 했던 만큼만, 그만큼만 행동할 수 있었다고. 딱 한번만 현실과 타협할까 고민하던 소리는 역시 편지가 남긴 여백 속에서 자신이 더이상 되돌아갈 수 없는 곳을 깨닫는다. 진실한 고백 사이로 그는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우치고 만다. 편지는 딱 1인용이라 외롭고 고독하다.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해야 하고, 그 몫을 나누기에 편지는 지극히 사적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성장한다. 다른 누가 대신 읽어줄 수 없어서. 디지털 텍스트만큼 빠르지 않아서. 빈 시간이 만들어져서. 편지 속의 수신자인 우리는 결국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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