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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다툼과 경쟁이 향할 곳, 마가(MAGA)가 구가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영화를 비롯한 모든 표현예술은 자유로움을 기초로 한다. 그렇다면 현대 미국은 자유로운 국가일까?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영화의 생산지이자 여러 표현예술을 주도하는 인물과 사조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니 대충 그렇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뜯어보아도 트럼프와 마가 세력이 융성하고 있는 지금의 미국을 두고, 감히 자유의 기지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표현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며, 미국의 리버럴(liberal)들이 자신들의 자유, 즉 불법 이민자를 욕하고 내쫓을 자유, 동성애자를 혐오할 자유, 여성이나 기타의 약자를 조롱할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에 따르면 자신의 이름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리버럴들은 위선자들이며 미국의 적이다. 또 이들은 모든 약자와 소수자뿐 아니라 리버럴까지 제거해야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작업이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200년 전의 남북전쟁은 사실 내전(Civil War)이었는데, 미국이 마치 또 다른 내전의 입구에 서 있는 듯한 모습이 자주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근대 이후 가장 자주 쓰였던 만큼 가장 많이 오염된 단어 중의 하나가 ‘자유’다. 조금만 머리가 있으면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의미라는 걸 알 수 있음에도, 그냥 제멋대로 하는 게 자유라고 받아들여지는 것도 많다. 그런 자유는 그 개념이 본질적으로 대항하고자 하는 반대개념인 ‘억압’과 자연스레 만난다. 제멋이 과연 누구의 멋이냐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고, 그 제멋을 위해 다른 이들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순간을 반드시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는 반드시 평등과 함께해야 한다. 흔히 자유의 상보 개념으로서 책임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다. 자유가 균등하지 못하면 누군가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부정된다는 의미이며, 이는 제각각 책임을 자각하고 실천한다고 해서 예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종종 자유에 책임을 수반하는 이유는 자유가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인 것으로서 남아야 한다는 관념 때문이다. 자유가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이라면, 그로 인해 발생될 수 있는 문제 역시 개인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요컨대 개인에게 부여된 자유에 관해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지, 외부에서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내적으로 형성되지 못하는 모든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자유로운가

트럼프가 존 보이트, 멜 깁슨과 함께 할리우드 특별대사로 임명한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 SHUTTERSTOCK

그러나 그런 자유와 책임은 고도로 성숙한 개인에 의해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쓴 에리히 프롬과 같은 사상가들은 자유를 인격 도야와 거의 동일한 차원에서 다룬다. 인격적으로 성숙된 개인은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어떻게 자유를 구현해야 하는지를 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책임질 줄도 안다. 실제로도 고대로부터 지금까지의 자유란 사실 성인 남성들의 자유,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운용할 수 있는 재산을 토대로 적절한 지적 수준에 도달한 자들의 자유’였다. 고대 공화정에서는 그런 이들만, 자유권을 내포한 시민권을 지닌 시민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 공화정에서의 시민권은 영토에 귀속되기 때문에 그 영토에서 태어나 자라난 이들에게는 별도의 제한 없이(즉, 성별, 재산, 신분 등의 제약 요건을 제거한 채) 시민적 자유를 균등하게 부여한다. 천부인권이기는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 영토 안에 거주하는 이는 누구든 그런 시민으로서 양육하고 보호해줄 것을 국가가 선언하는 것이고, 그 계약서가 바로 헌법이다. 때문에 그런 헌법에 기초를 두어 제정되는 모든 법률은 자유의 균등함을 보장하고 조율하기 위함이다. 개인에게만 맡기는 것도, 책임을 강제하는 것도 아니라 공동체를 기준으로 시민인 우리가 서로 조율하는 것이다. 윤석열은 그런 헌법적 책무를 방기했기 때문에 헌법적 수단을 써서 우리 시민들이 쫓아냈다. 그런데 ‘공화당’의 대통령 트럼프도 지난 250년간의 미국을 공화정으로 지탱시켜준 미국 헌법을 무시(無時)로 무시(無視)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은 그들이 그렇게나 자랑해왔던 제도가 압제자들을 막는 방벽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그를 쫓아낼 힘을 가진 시민의 비율이 그리 압도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그간의 공화정 미국을 지탱해왔던 건 헌법과 연방주의였고, 그에 토대를 둔 사법 시스템이었고, 그런 질서를 존중하는 공화-민주 양당 제도였다고 할 만하다. 하나 그것의 정치적 한축이었던 공화당은 길게는 레이건 이후 40여년, 짧게는 오바마의 집권기를 거치며 트럼프가 등장했던 10여년의 시간 동안, 급속히 반공화적 극단주의와 고립주의 세력에 거의 완전히 먹혀버렸다. 게다가 이들의 노골적인 압제에 실효적으로 저항하는 주체는 이제 정치세력으로서의 민주당-리버럴이 아니라, 공화정 미국의 헌법적 정신과 삶의 양식을 지탱하는 사회문화적 세력으로서의 리버럴이다. 이들은 언론과 미디어를 필두로, 대학과 학문, 각종 대중예술을 주체로 하고 있다. 트럼프가 가짜 뉴스(fake news)의 진원지로서 <뉴욕타임스>등을 콕 집어 말하고, 지상파 네트워크와 거액의 소송전을 벌이고, 미국 공영방송국 NPR과 PBS에 대한 국가 지원을 끊고, 하버드대학교 등을 반유대주의의 근거지로 지목하며 탄압하는, 심지어 할리우드 특별대사라는 이상한 자리를 만들어 우파 배우를 임명하는, 시쳇말로 뻘짓을 벌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두에서 ‘미국은 충분히 자유로운가?’라고 물었던 이유는, 가뜩이나 위기에 처한 시네마가 다양한 방식으로 출구를 모색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길을 가늠하게 해줄 가장 중요한 지표인 미국의 사정을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자유분방해야만 좋은 예술이 탄생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그런 자유를 지향하는 가운데에 좋은 표현이 생성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미국의 영화가 여전히 세계의 제일 앞 열에 위치해 있다면 그것은 미국 사회의 자유로움 덕분인지, 아니면 그저 자유롭게 크기만 한 시장 덕인지, 혹은 미국의 헌법 정신인 ‘표현의 자유’를 두고 마가와 대중예술이 벌이는 서로 다른 버전의 자유로움 경쟁 때문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풍자와 조롱, 창의적 대응 사이

10월18일 워싱턴 D.C.에서 벌어진 반(反)트럼프 시위 'No Kings'. SHUTTERSTOCK

물론 마가의 표현은 자유를 구가하려 하면 할수록 구려지기만 한다. 이들에게는 언론이나 학문, 대중예술 등을 선도할 역량이 없다. 그래서 이들은 새롭고 좋은 표현을 해내는 게 아니라 기존 표현을 모두 나빠지게 함으로써 판을 바꾸려 한다. 마침 등장한 소셜미디어가 이들에게 신나는 공작소가 되는 이유다. 그런 와중에 사회문화적 리버럴이 토대로 삼고 있는 각종 기구들의 경제적 토대와 사회적 토대를 공격해서 취약하게 만든다. 지금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대중예술들은 이에 대한 공포적 혹은 신경질적 반응과 풍자적 조롱, 그리고 창의적 대응 사이에서 왔다 갔다 오르락내리락한다. 이 길의 끝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미국의 정치경제적 토대가 다시 자유와 창의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든, 사회문화적 표현이 그 반동을 제압하는 기수가 되든, 모종의 변화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미래의 새 길이 다시금 미국에서 열릴 것 같지는 않다. 나쁜 길이면 혹시 몰라도 적어도 좋은 길은 아닐 것 같은 예감이다. 이 예감이 불길한 것일지, 흥미로운 것일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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