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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보편적인 선이 비정치적일 수 있는가, 제임스 건의 <슈퍼맨>이 품은 근본적 문제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가 지금의 A24처럼 자기만의 고유한 특색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때가 있었다. MGM은 뮤지컬을, 유니버설은 호러를 잘 만들었다는 식이다. 클래식 할리우드 시절 워너브러더스를 특징지었던 것은 사회비판적인 사실주의 영화들이었다. 이 하나만으로 워너브러더스에서 나온 모든 영화들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불멸의 <루니 툰>애니메이션 단편들이나 베티 데이비스 주연의 멜로드라마 같은 것들은 어디에 놓을 것인가) 그래도 이를 따라 이야기를 전개한다면 <나는 탈옥수>(I Am a Fugitive from a Chain Gang)에서부터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까지 이어지는 나름 일관된 흐름이 읽힌다. 그것은 MGM이나 파라마운트가 내놓은 화려한 영화들이 건드리지 못하는 사실적인 미국의 역사다.

물론 여기엔 언제나 한계가 있다. 시대의 한계, 미국의 한계, 대중영화의 한계, 대형 제작사의 한계. 많은 영화사가들은 스튜디오 시스템 시절의 워너가 노동자와 하층계급의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어 팔아왔으면서도 가장 노동 탄압적인 회사이기도 했다는 사실도 지적할 것이다.

비정치적인, 하지만 비정치적일 순 없는

<슈퍼맨>(2025)

지금 이 시대에 워너 영화들의 ‘하우스 스타일’을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해리 포터>시리즈, DC 확장 유니버스(DCEU) 시리즈, <컨저링>시리즈, <몬스터버스>시리즈 사이에 낀 스탠드 얼론 영화들을 노려봐도 이전과 같은 일관성이나 의지는 없다. <바비>가 할리우드 페미니즘 영화라면 그건 워너의 사회비판 정신이 개입했기 때문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

그래도 최근 올해 나온 워너의 영화 몇편엔 흥미로운 시대의 반영이 보이고, 이것을 영화사의 역사 안에 넣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다. <미키 17><씨너스: 죄인들><슈퍼맨><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정도가 특히 용의선상에 오를 만한데, 물론 이것들을 스튜디오 시절 하우스 스타일에 넣어 분석하면 전혀 먹히지 않는다. 일단 <미키 17>과 <슈퍼맨>은 SF, <씨너스: 죄인들>은 호러 뮤지컬이다. 그나마 사실적인 영화로 분류될 수 있는 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인데, 이 영화를 기존 스타일 안에 넣어 분석하는 건 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이건 폴 토머스 앤더슨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봐도 이상하다.

이중 제임스 건이 새로 시작하는 DC 유니버스(DCU) 시리즈의 첫 영화 <슈퍼맨>(2025)은 가장 안전한 작품처럼 보였다. 네 영화 중 유일하게 역사가 긴 IP, 그것도 코믹북 슈퍼히어로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주인공 슈퍼맨은 아마 미국 슈퍼히어로 역사상 가장 클린한 캐릭터일 것이다. 미국 코믹북 슈퍼히어로를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슈퍼맨을 가져와 더럽히고 부수고 뒤집는 것이다.

고전이 된 리처드 도너의 두 <슈퍼맨>영화로 시작하는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은 바로 그런 비정치적이고 깨끗한 슈퍼맨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의 정치보다 신화화된 위엄이 더 중요한. 그렇다고 도너의 영화가 절대적으로 비정치적인가? 첫 <슈퍼맨>영화에서 진 해크먼이 연기한 렉스 루터는 산 안드레아스 단층을 건드려 부동산 가격을 조작하려는 악당인데, 세상에 비정치적인 부동산 투기꾼이 존재하던가?

이후 만들어진 수많은 <슈퍼맨>각색물들, 그러니까 <로이스와 클락><스몰빌>같은 작품들은 슈퍼맨이 결코 비정치적인 미국 백인 남성 영웅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백인 남성 영웅은 오로지 겉보기뿐이다. 슈퍼맨으로 이야기를 길게 끌다보면 우리의 주인공이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고 결국 불법 이민자라는 사실을 건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당연히 이 주인공이 하는 행위도 비정치적일 수는 없다. 선을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도 현대 미국이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에서라면? 그 선은 비정치적이 될 수 있는가? 아니, 그냥 보편적인 선이 비정치적일 수 있는가? 만화 속 슈퍼맨은 KKK단과 싸웠고, 그 매우 정직하고 당연한 선행은 정치적이었던 것을 기억하자.

그러니 제임스 건의 <슈퍼맨>이 이 각색물의 연속성 안에서 뭔가를 건드릴 것이라는 건 예상했던 것인데, 의외로 영화는 큰 걸 찔렀다. 당연히 보라비아와 자한푸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시놉시스만 보면 방심할 수 있다. 예고편도 최대한 감추려고 한다. 하지만 아랍계가 대다수인 것처럼 보이는 약소국을 침공하려고 하는 유럽계 국가를 볼 때 지금 우린 어디를 떠올릴 수 있을까?

제임스 건은 각본이 가자 침공 이전에 쓰였다고 말했고 그건 사실이다. 건은 이 두 나라가 철저하게 허구의 국가이고 지금 가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가자는 늘 그곳에 있었다. 2023년 침공 전이라고 그곳 사정이 엄청나게 다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늘 의식하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옆에 있었다. 바로 DCEU에서 두편의 ‘원더우먼’ 영화를 찍었던 갈 가도트다. 건이 계속 부정하고 심지어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관객들은 여전히 그 영화에서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을 본다. 적어도 이건 러시아-우크라이나보다 더 잘 들어맞는다. 이 전쟁의 묘사에서 인종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심지어 건은 슈퍼맨이 백인 구원자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자한푸르에 다인종인 다른 팀을 보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야기를 하면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다

<슈퍼맨>(2025)

슈퍼히어로의 세계에서 현실이 이렇게 얇은 베일을 쓰고 들어오는 걸 보는 건 희귀한 경험이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부분은 영화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이스 레인과 클라크 켄트의 긴 대화는 아주 평범하지만 그 때문에 이상하고 낯설다. 저널리즘에 종사하는 두 사람이 정치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서로를 정치적 의견을 갖고 있는 정치적 존재로 인식한다. 그리고 막판에 두 사람 모두 정치적인 행동을 한다. 그들 중 한명이 슈퍼히어로 중 슈퍼히어로인 슈퍼맨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편견을 통해 곱게 탈색해놓은 세계가 세상의 지저분함으로 오염되는 것을 보게 된다. 더이상 건의 DCU는 현실로부터 분리된 안전지대가 아니다.

물론 슈퍼맨은 여전히 슈퍼맨이고 이 이야기는 초능력자들이 날뛰는 가상 세계이기 때문에 모든 게 일대일로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이 상황은 영화의 정치성을 뒤튼다. 클라크 켄트는 자연인으로서 아마 진보이거나 진보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이 <슈퍼맨>이라는 영화에서 슈퍼맨으로 존재한다면 이것은 여전히 보수적인 이야기, 그러니까 힘을 가진 사람의 책임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스파이더맨>도 그 이야기가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둘은 아무래도 동원할 수 있는 힘의 차원이 다르다.

여기서 슈퍼히어로를 갖고 현실 세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의 위험성이 드러난다. 건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처럼 치밀하게 연결된 DCU를 만들 생각이라면 더욱 그렇다. 오로지 힘을 가진 사람들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영화에 우리의 삶과 세계를 투영할 것인가. 건은 슈퍼맨 주변의 수많은 작은 사람들에게 역할을 주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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