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애니메이터로 입사해 <인어공주><미녀와 야수>에 참여한 브렌다 채프먼 감독은 <라이온 킹>의 스토리 슈퍼바이저로서 애니 어워즈(Annie Awards)에서 스토리 부문을 수상했다. 무려 할리우드 여성 최초의 기록이다. 실제로 그는 많은 ‘최초’를 지녔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이적해 연출한 <이집트 왕자>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중 여성감독이 제작한 최초 장편애니메이션이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선 <메리다와 마법의 숲>으로 ‘프린세스 문법’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공주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올해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 심사위원장에 선정된 브렌다 채프먼 감독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으며 애니메이션이 지녀야 할 미덕과 태도를 돌아봤다. 그가 몸소 쌓아온 시간들은 새로운 세대의 창작자들에게 전유되고 있다.
- 올해 BIAF의 심사위원장으로 선정되었다. 이전부터 BIAF로부터 여러 번 초대를 받았다고.
이전에도 BIAF측에서 심사 기회를 여러 번 주셨는데 아쉽게도 그때마다 일정이 어긋났다. 올해 심사위원장 자리를 제안해주셨을 때에는 주변에서 강력한 추천이 쏟아졌다. 특히 과거 BIAF와 인연이 깊은 <모아나>의 존 머스커 감독님과 <포카혼타스>의 에릭 골드버그 감독님이 꼭 가라고 하셨다. (웃음)
- 심사 과정에서 어떤 점을 중요하게 들여다볼 예정인가.
고정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이 궁극적으로 남기는 인상이 중요하다. 여기서 인상이란 캐릭터가 관객의 심장을 뛰게 만들고 여운을 남기는 것을 말한다. 관객이 작품을 응원하고 주인공의 성공을 간절하게 소망하게 되는 것은 캐릭터로부터 공감을 얻을 때다. 그리고 이 공감은 캐릭터가 지닌 결핍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내면의 타고난 부족함이 있을 때 많은 이들이 그 안에 마음을 나눠준다. 관객을 이야기 안으로 몰입시키는 힘이 있어야만 한다. 캐릭터 이외에도 비주얼적 요소, 사운드 뮤직 등 다양한 요소를 아울러 고려할 예정이다. 개인적으로는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 요소들을 좋아한다. 예상외의 반전이나 캐릭터의 의외성 같은 것들.
- <라이온 킹>의 스토리 슈퍼바이저로 작업하면서 애니 어워즈 스토리 부문을 수상했다. 극장 침체기를 두고 많은 산업 관계자들이 그 해결책으로 “좋은 스토리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좋은 스토리의 정의는 불명확하다. 브렌다 채프먼 감독이 정의한 좋은 스토리란 뭔가.
결국 캐릭터간의 생명력 있는 관계를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라이온 킹>스토리의 핵심 요소는 심바와 아버지의 관계다. 다른 인물들과 비교되는 대조점이 특히나 이들의 비극을 부각해줬다. 하지만 이제는 스토리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 같지 않다. 그 좋은 스토리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어떤 구성 요소를 함께 녹여낼 것인가를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뮤지컬은 이야기만큼 좋은 넘버가 강조된다. 고전극이라고 하면 시대상을 현실적으로 재현한 미술이 중요해질 것이다. 다만 애니메이션을 비즈니스 관점만으로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 선후관계가 명확해야 한다. 영화와 예술이 먼저 자유롭게 탄생하고 그 뒤에 비즈니스가 예술을 지원해야 하는데 요즘엔 반대로 되고 있다. 비즈니스를 위해 생명력 없는 후속작을 재편하거나 굿즈 위주의 캐릭터를 개발하면서. 많은 영화가 현재 이 함정에 빠져 있다.
- 스토리가 다른 요소와 어우러진 작품을 생각하면 단연 <이집트 왕자>가 떠오른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연출한 이 작품은 주제가로 주목받으며 제7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제가상을, 4회 크리틱스 초이스에서는 장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나와 두명의 감독이 공동 연출했다. 그런데 세 감독 모두 종교가 딱히 없었다. (웃음) 한스 치머 작곡가의 음악은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 주제가 를 처음 녹음하던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뭐랄까, 영혼이 깃든 듯한 느낌이었다. 극적 분위기를 따라 상승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 높은 발코니에서 녹음했다. <이집트 왕자>이전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익살스럽고 유머러스한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집트 왕자>는 그런 무드와 거리가 멀었다. 전체관람가지만 아동용 애니메이션보다는 성인 관객의 관심이 필요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스토리 톤을 맞추는 게 정말 어려웠다.
- 픽사에서 <메리다와 마법의 숲>으로 새로운 커리어를 이어갔다. 용감무쌍하고 도전적이고 무엇보다 한창 사춘기를 거치는 예민한 메리다는 기존 프린세스 문법에 균열을 낸다.
전형적인 디즈니 공주와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 그게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의도다.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어놨다. 물론 나도 공주들을 좋아한다. 동화스러운 이야기도 뭉클하고. 하지만 전통적인 공주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역동적인 고난을 겪고 나서 보상으로 받는 게 늘 왕자다. 응? 이것뿐이라고? (웃음) 이걸 바꾸고 싶었다. 또 핼러윈의 분위기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많은 공주가 되려는 어린이들 사이에서 메리다가 된 어린이를 보고 싶었다. 메리다의 엄마인 엘리노어 왕비는 따지고 보면 워킹 맘이다. 자신의 업무가 중요한 엄마와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사춘기 딸의 소통 과정을 풀어나가고 무엇보다 유지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실제로 무수한 동화에서는 공주들이 엄마가 없다. 그래서 엄마가 존재하는, 심지어 그와 갈등을 빚고 진짜 현실적인 공주의 삶을 고민하는 인물로 전형성을 깨부수고 싶었다.
- 그럼에도 디즈니 프린세스 계열에 메리다를 포함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논의가 스튜디오 내부에서 제기된 적 있다고. (웃음)
일관성이 없었다. 어떨 땐 포함하기도 하고 어떨 땐 배제하기도 하고. 초기에는 디즈니에서 메리다를 프린세스 라인에 포함하기 위해 모델 변형을 했다. 허리가 잘록하고 가슴도 나온 성숙한 모습으로. 온라인에서 노발대발 청원이 이어졌다. 그때 디즈니측에서도 깨달았다. 이렇게 하면 안되는 구나, 하고. 그래서 내가 개발한 처음의 메리다로 다시금 돌아올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