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0월은 음원 작업의 마감이 있어서 바쁘게 일했습니다. 밥 먹고 작업하고의 반복이었던 것 같네요. 금욕적이고 약간 괴로운 생활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조금 즐거운 일이 있었습니다. 오전 11시부터 한 시간 동안 방송하는 MBC FM4U <안녕하세요 이문세입니다>의 이문세가 미국 공연을 가는 바람에 그의 친구이기도 한 가수 이소라가 객원 디제이를 맡게 된 것이었습니다. 일주일이긴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저는 오전 11시까지 해야 하는 모든 집안일을 우당탕 끝내고 라디오 앞에 경건하게 앉아 우리 소라(죄송합니다)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외부 활동을 잘 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팬들의 애정 어린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닌데요, 오래간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여전히 사랑스럽고 프로페셔널한 이소라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한 청취자가 “몸은 편안하게, 귀는 쫑긋 듣고 있어요”라고 사연을 보내자 “라디오는 바로 그렇게 들으시면 되어요!” 하던 상냥한 목소리가 기억나네요. 오전 시간이 유난히 빛나던 일주일은 너무 빨리 흘러가고 그녀도 떠났습니다. 저는 다시 쓸쓸한 도시의 인디 음악가가 되어 회색빛 얼굴로 작업실 출근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신해철 라디오를 듣던 조숙한 아이였습니다. 특히 고등학생 때는 선생님 말씀보다 디제이 말씀을 더 잘 들었던 것 같네요. 그때는 반항적이고 통통 튀는 분위기의 프로그램을 주로 들으며 학업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이후 20대를 즐기느라 한동안 라디오를 잊고 지내기도 했지만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다시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약간은 심심한 느낌이 의외로 위로가 되는 때가 있지요. 청취자들이 보내오는 사연을 디제이의 음성으로 엿듣다 보면 다들 평범하고도 다채롭게 살아가고 있구나 감탄하게 되고요. 무엇보다 제작진과 디제이가 고르고 전해주는 음악은 어떤 알고리즘의 추천보다 마음 가까이에 닿습니다. 이런 제가 좋아하는 몇개의 라디오 프로그램들을 소개합니다.
동네에 오래된 일식집이 있는데, 거긴 저녁 식사 시간이 되면 마치 벨벳 같은 목소리의 여성 디제이가 진행하는 라디오를 틀어줍니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분명 “우와 이 사람 누구야?”를 외치게 되는 특별한 음성인데요, 저도 그렇게 이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습니다. 올드팝 선곡이 기가 막힌 CBS <배미향의 저녁스케치>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같은 곳에서 같은 시간에 그 목소리는 들려옵니다. 가끔 그 일식집에 가고 싶으면 집에서 이 프로를 듣기도 합니다.
인디 가수도 가수이긴 하지만 라디오에 출연할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쪽(?) 사람들을 그나마 챙겨주는 방송국은 EBS입니다. 저는 <이승열의 세계 음악 기행>의 초대석 코너에 세번 이상 출연한 러키 인디맨인데요, 그때마다 승열 디제이님은 대본은 거의 보지 않고 저를 바라보며 그냥 대화를 나눠주셨습니다. 진짜 궁금한 걸 물어보시더라고요. 저도 그래서 진짜 대답을 하게 되었어요. 그 좋았던 기억이 그리워지면 오후 2시에는 EBS로 주파수를 옮기곤 합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클래식 음악 전문 라디오 채널 에 채널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새벽 1시면 <세상의 모든 음악 전기현입니다>를 들으며 하루를 마감하고요, 주말의 별미 같은 토·일 자정 방송 <Jazz 수첩>도 놓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집안일을 하거나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는 <생생 클래식>을 듣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사랑한 디제이는 윤수영 아나운서입니다. 클래식은 어렵고 다가가기 힘들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대중매체에서 자주 쓰였던 음악들을 발랄한 톤으로 소개하는 매력적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수영 아나운서가 다정하게 읽어주던 어린이들의 귀여운 사연도 기억에 납니다. 다양한 풍경과 추억 속에 <생생 클래식>이 함께했습니다. 2022년까지 살던 낡은 빌라에서 밥을 먹으며, 누군가의 조수석에 앉아 차창 밖을 보며, 혼자 여행을 갔다가 폭설에 갇힌 제주도 숙소 안에서….
세상의 사정은 알 수 없지만 24년 봄은 라디오 프로그램의 상징적인 디제이들이 유난히 많이 교체되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햇수로 5년을 채워가던 그녀가 개편에 포함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지요. 실시간 채팅방에서 맨날 같이 놀던 청취자들은 그날 ㅠㅠ를 끊임없이 누르고 있었습니다. 방송 막바지에 쇼팽의 이별의 곡이 흘러나오자 저도 아쉬운 마음에 보이는 라디오에 들어갔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새하얀 스웨터를 입은 그녀는 애써 웃는 것 같은 옆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탄탄하고 밝은 톤으로 진행했지만 그날은 몹시 흔들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차분하게 가다듬으려 노력하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동안 정말 행복했습니다.” 울컥하는 음성이 그 사이를 삐져나왔습니다. 저는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속상해서 눈물이 납니다. 잘하고 있는 사람을 개편이다 뭐다 하면서 왜 바꾸는 거지? 그런 마음 때문에 한동안 개편 이후 들어온 아나운서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다가 정오에 라디오를 듣던 습관은 고쳐지지 않아 결국 꾸준히 듣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1년 반 이상을 훌륭하게 진행한 그도 오늘 마지막 방송을 하고 떠나갔습니다. 계절이 가듯이 다들 머물다가 떠나는 거였습니다. 영원한 건 절대 없다는 걸 지드래곤이 일찌감치 알려줬었는데, 또 바보같이 잊어버렸습니다. 아쉽고 허전한 마음에 라디오 개편도 지드래곤도 괜히 미워집니다. 25년의 가을도 벌써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영원한 건 절대 없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