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게 하고 꿈 깨우기. 변성현의 인물들은 서로에게 늘 그런 식이다. 그를 향한 팬덤이 세 번째 장편인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 2016) 이후 모인 탓에 덜 회자된 초기작들부터도 그랬다. <청춘그루브>(2010)의 세 친구는 힙합 그룹을 결성해 홍대에서 인기를 얻지만 메이저 음반 기획사로 인해 와해한다. 한 멤버만이 자본의 선택을 받기 때문이다. <나의 PS 파트너>(2012)의 두 남녀는 연애와 결혼이라는 형식에 붙잡히다 그와 무관한 형태의 욕망을 경험하는데, 남자가 여자의 결혼식에 찾아와 난동을 부리자 여자는 말한다. “이 바보 같은 결혼식 깨줘서 고마워.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으니까.” 긴 잠에서 깨어난 여자는 변명하듯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에게 응수한다. “이제 안 믿어, 그 런 말.”
그 후 <불한당>과 <킹메이커>(2021)에 이르러 ‘믿음’은 변성현의 인물들이 맺는 복합적인 관계를 집약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불한당>이 사람 아닌 상황을, <킹메이커>가 자기 아닌 자기 욕심을 믿는 편이 낫다는 명대사를 남긴 것으로만 기억되기에는 아쉽다. 그 대사의 주인들에 주목해야 한다. <불한당>의 재호(설경구)는 현수(임시완)에게 그리 충고했으나 누구보다 현수의 애정을 갈구했다. <킹메이커>의 선거 전략가 창대(이선균)도 비슷하다. 그는 운범(설경구)의 당선을 돕는 그림자를 자처하다가 운범과 방법론을 두고 다투기까지 하지만 그가 갈구한 건 결국 운범의 인정이었다. 애정과 인정. 그걸 바라는 자가 약자일 수밖에 없다. 상대에게 인간적인 신뢰를 직접적으로 청하면서 볼품없어질 바에야 다소 쿨한 태도를 꾸며내서라도 그 곁을 맴도는 건 재호와 창대의 장기이기도 하다.
<길복순>(2023)은 또 어떤가. 복순(전도연)은 속이는 게 거의 직업이라 할 수 있다. 집에서는 살림, 일터에서는 죽임을 행해야 하는 이중고에 놓인 그는 마지막 작품을 끝으로 은퇴를 다짐한다. 딸 재영(김시아)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복순과 재영은 여느 모녀처럼 서로에게 숨기는 게 있고, 카메라는 그걸 이리저리 들춰가며 결말로 가는 속도를 낸다. 그러다 종국에는 가족에 관해 얼마나 알아차렸는지를 가족에게 굳이 알리지 않고도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독은 영화 속 가장 조용한 순간을 빌려와 속삭인다.
그러니까 <불한당>으로 누아르의 호모 소셜을 퀴어링(queering)할 때든, <길복순>으로 킬러물의 클리셰를 갖고 놀 때든, 변성현의 관심사는 언제나 관계의 그물망을 다시 짜는 절차로써 구현되었다. 그 조직감이 얼마나 탄탄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헐거울지언정 매혹적인 구석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권할 만하다는 감독의 자신감이 엿보일 정도로, 어떤 인물들은 설명을 거부했다. <길복순>의 남매 차민규(설경구)와 차민희(이솜)가 암시한 근친상간 코드를 떠올려봐라. 그런 기개야말로 ‘불한당원’으로 일컬어지기 시작한 그의 팬들에게 유독 환영받았다. 그조차 영화에 따라붙는 부가 콘텐츠인 것처럼 말이다. 설명되지 않아서 더 재밌는 사이, 설명할 수 없어서 더 섹시한 사이. 그간 변성현의 세계는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유희로 살아 숨 쉬었다.
다만 근작 <굿뉴스>의 아무개(설경구)와 고명(홍경)은 재해석의 여지를 열어둔다기보다 서사 전개를 위해 상호보완적으로 호흡했다고 보는 편이 맞지 않을까. 두 사람은 영화가 지시하는 달의 앞면과 뒷면처럼 세대론적으로도, 버디물의 전형으로도 읽힐 수 있으나 그 주제를 고려했을 때 거의 한 인간의 양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름을 나눠 가진다는 모티프도 거기에 힘을 실어준다. 실화에 기반을 둔 이야기를 5장 구조로 재구성하면서 감독의 유구한 테마인 믿음의 다른 측면을 말하기까지, <굿뉴스>는 굳이 미묘한 관계성까지 필요로 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나를 꿈꾸게 하고 깨우는 존재는 항상 나 자신이 아니던가. 비로소 그런 의문까지 건들기 시작한 변성현의 다음 챕터는 또 어떤 그물로 무얼 건져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