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기획]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로 다시 쓰다, <프랑켄슈타인> 리뷰
정재현 2025-10-30

“내가 죽음을 정복할 거예요.”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은 자신의 전부였던 어머니가 사망하자 생과 사의 힘을 얻는 데에 일생을 바친다. 빅터는 신화 속 창조주 프로메테우스가 되고자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흙더미에서 인간을 빚듯 사체 더미에서 완전한 신체를 찾아내 피조물(제이컵 엘로디)을 창조하고, 인류에게 지혜를 선사한 프로메테우스처럼 피조물에게 언어를 가르친다. 그러나 빅터는 실험 성공 이후의 생까지 고려하지 못했다. 막연한 공허에 사로잡힌 창조주는 자신의 피조물을 증오하고 질투하다 급기야 그를 제거하려 든다.

본디 메리 셸리가 쓴 원작 소설에도 ‘현대의 프로메테우스’가 부제로 붙은 만큼,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프랑켄슈타인>을 분석하는 주요 모티프다. 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는 아키타입으로서의 프로메테우스를 넘어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로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쓴다. 바슐라르가 주창한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의 왕 제우스에 불복종하며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듯 아버지나 스승 이상의 지식 혹은 가치를 추구해 세계를 창조하려는 욕망을 일컫는 개념이다. 영화 속 빅터는 어떠한가. 그는 당대 최고의 의사였던 아버지(찰스 댄스)의 손끝에서 어머니가 목숨을 잃자 아버지의 과실을 극복해 죽음 자체를 정복하려는 광기에 휩싸인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삶을 선사했지만 정작 두 부자는 죽음으로 결속된 셈이다. 피조물 또한 마찬가지다. 빅터는 피조물을 창조해 생명을 불어넣고도 피조물의 무지를 근거로 그를 괴물로 취급하며 해친다. 피조물은 인간 세상에 나아가 인간의 언어를 습득해 지성을 갖춘다. 그리고 죽지 못하는 자신의 육신을 저주하다 빅터의 목표였던 죽음의 정벌을 넘어 죽음을 갈망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둘은 자신의 아버지를 증오하다가도 이내 부친을 닮아간다. 빅터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 그대로 피조물을 착취하고, 피조물은 빅터에게서 받은 상처를 다른 인류에게 폭력을 동원해 전가한다.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게 독수리로부터 매일 간을 쪼이는 형벌을 내린 것처럼 빅터의 아버지는 평생 빅터를 잠식하는 죽음의 공포를 드리운다. 프로메테우스 신화 못지않게 소설과 영화 모두가 중요하게 인용하는 서사시는 존 밀턴의 <실낙원>이다. 하느님이 자신의 피조물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쫓듯 빅터는 피조물이 자신의 천국에 영영 발 들이지 못하도록 박해한다.

한편 아버지(로부터)의 이름은 삶의 방향을 속박하는 도구다. 빅터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름 빅터에 ‘정복자’라는 뜻이 있음을 수차례 분명히 하며 신의 섭리를 뛰어넘고자 한다. 피조물은 빅터가 벌인 사고 이후 한동안 기억을 잃는다. 그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유일한 어둠은 ‘빅터’라는 단어뿐이고 기억을 좇다 당도한 폐허에서 창조주의 오만에 분노한다. 죽음으로부터 동의 없이 삶을 소생하더니 다시 그 삶을 앗아가려 하다니. 오직 적개심이 삶의 동력이 된 피조물은 자기 인생에 남은 저주의 원흉 빅터를 벌하는 여정에 나선다. 이처럼 <프랑켄슈타인>은 아버지라는 이름의 굴레에 갇힌 남자들의 숙명을 그린다. 한데 이 이야기는 비극이 아니다. 최후의 대결에 이르면 빅터도 피조물도 아버지의 악업을 청산해 카르마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응시한다. 그 희박한 확률에 몸을 던진 빅터와 피조물은 각자의 불행은 물론 불가항력 속에서 죽음만을 불사하던 수많은 남성들까지도 구원한다. 모든 일이 끝나고 이들이 노 저어가는 곳은 ‘집’이다. 어쩌면 아버지가 지었고, 아버지로부터 도망쳤던 그곳을 향해 다시 한번 운명의 돛을 편다.

관련영화

관련인물

사진제공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