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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희의 클로징] 당신의 은퇴를 향해 보내는 박수

나이가 들어서일까.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커진다.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에도 그랬으니까 나이 탓은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런데 이 말 자체에 이미 문제가 있다. 일단 나이가 ‘탓’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걸 갖고도 스스로를 위로할 이유도 없다. 뭔가 방어적이다. 이를테면 나이가 든 ‘덕분’에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비로소’ 더 잘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라 ‘자부’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해놓고도 뭔가 ‘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굳이 그런 것에 대해 발끈하며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가는 것 역시 다분히 방어적이라 느껴지기 때문일 테다. 아무래도 근본은 ‘아쉬움’에 있는 것 같다. 아쉬움은 무력감의 표현이고, 무력감이란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좌절에 의한 것이고, 이 경우의 좌절은 아무래도 나이가 너무 ‘어려서’보다는 ‘많아져버려서’에 기인하는 듯하니 말이다. 꽤 유서 깊은 동네의 밥집이자 술집이 장사를 접는 모습을 보며 드는 아쉬움이자 무력감이다. 가게 터가 재건축에 들어가는데 자리를 옮겨 장사를 이어가기에는 사장님이 너무 연세가 드셔서 이렇게 됐다. 내가 사는 구도심에는 이런 일들이 잦다. 지난 10년 가까이 장사를 하신 이 가게도 재건축 때문에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밀려나고 또 밀려나는 고생을 더 하고 싶지는 않으신 게다. 원래 가게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실은 내가 단골이 됐던 시점이 대략 그즈음부터였다. 그래도 어딘가에서 장사를 이어가주십사 부탁드리기가 계면쩍은 이유다. 오랜 장소엔 사연이 고인다. 내 사연도 그곳에 한 가득 고여 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벗들과 만났다. 울분을 토한 적도 많았다. 말도 안되는 이유로 우리들이 받아야 했던 탄압과 고통은 만약 그곳이 없었더라면 필경 더 견뎌내기 어려웠을 테다. 그때마다 사장님은 맛난 밥과 안주를 내주셨고, 슬그머니 한두 마디를 거들어주시기도 했다. 노년에 그와 같은 음식 솜씨와 총기(聰氣)를 유지하시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우리는 위로를 받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은 젊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겠느냐고, 이대로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건 부끄러운 거 아니겠냐고. 그러고 보니 이 유다른 아쉬움과 무기력함은 그런 상실감 때문일 것 같다. 그 사장님과 이 가게가 있는 한 아직 우리는 한창 젊은이였는데, 이제는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하나의 퇴장은 다른 하나의 퇴장을 예비하게 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사장님이 넘겨주신 골동품급의 궤를 내 사무실에 가져다놓았다. 사람들이 모여 울분을 토하고 삶을 논하는 자리를 내 방식으로라도 이어가보겠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사연이 고인다는 것이고, 그렇게 무언가를 이어가는 일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여태껏 이 가게 이름의 제대로 된 뜻도 묻지 못했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사랑을 받는 동물 혹은 ‘크다’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 ‘곰’에, 꼭대기 혹은 평평한 곳을 뜻하는 ‘마루’가 합쳐진 이름인데,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유추해낼 수 없는 독특한 사연과 의외의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새삼 흥미롭다. 이걸 핑계 삼아 나중에 인사나 넣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