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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타인의 재판정 앞에, 유선아 평론가의 <세계의 주인> 비평
유선아 2025-10-28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책에 실린 상자 삽화를 본다. 각기 다른 주석이 붙은 그 삽화를 한번은 어떤 사물로, 한번은 다른 사물로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우리는 그것을 해석하고 또 우리가 해석한 대로 그것을 본다. 비트겐슈타인의 논지 일부를 빌려와 다시 확장하면 우리의 행동은 타인의 규범 안에 있을 때 받아들여지며, 우리 언어는 타인의 경험과 지성에 의해 해석된다. 만일 우리가 상대에게 잘못을 범한다면 오로지 그들의 관대함에 의해 용서받을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 세계는 상대의 인식 범위 안에서만 존재하며 그 틀 안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 ‘토끼-오리 머리’ 그림처럼 하나의 대상을 보았을 때 인식의 범위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바라보는 것이 상자 삽화나 토끼-오리 머리의 그림이 아니라 <세계의 주인>에서처럼 ‘트라우마’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 주인공 이주인(서수빈)이 오해와 오독의 터널을 통과해 이해와 수용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구나의 세계 안에 자리한 재판정으로 들어서야 한다.

해석과 오독 사이

<세계의 주인>에 법원 재판 장면은 단 한번 등장할 뿐이다. 주인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면 봉사활동을 하는데 여러 명의 여성과 한명의 남성으로 이루어진 이 커뮤니티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은 평범해 보이는 대화를 나눈다. 조금 의아한 게 있다면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어떤 계기에서 봉사활동으로 친목을 도모하는지에 대한 것 정도다. 그 커뮤니티는 점차 폐쇄성이 짙은 집단임이 드러난다. 주인이 남자 친구와 동행한 날, 한미도(고민시)는 외부인을 데리고 온다는 사전 공지와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며 언성을 높여 힐난한다. 미도가 증인석에 앉아 상대측 변호사의 심문을 받는 법원 장면이 나오고 나서야 이 봉사 커뮤니티는 성폭력 피해를 겪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영화의 유일한 재판 신에서 변호인이 던지는 질문은 피해 사실에 관한 진술의 일관성이 아니라 캐릭터의 일관성을 약점 잡는다. 학창 시절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미도는 아버지에게 하트 이모티콘을 붙인 문자를 보냈고, 태권도 대회에서 메달을 따고 난 뒤 밝게 웃었으며, 용돈이 부족해서 50만원을 더 부풀려 입시 학원비를 요구했다. 즉 성폭력 피해자에게서 안전하게 떠올릴 수 있는 서사와 행동, 더 정확히 말하면 피해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 쉽게 연상할 만한 침울한 정서의 일관성이 미도에게 없었다는 게 그가 증인석에서 궁지에 몰리는 이유다.

주인 역시 그가 겪었던 트라우마라는 강력한 언어가 공언된 순간, 그것은 타인의 세계에서 즉시 수용되지 못하고 해석을 요구한다. 친구들은 각자의 재판정 앞에 주인을 소환한다. 이따금 알지 못하는 새 누군가의 세계 속으로 불려가 그들의 상식과 이해의 폭으로 판결지어지는 재판정 앞에서 우리의 진술은 어떤 오역을 거치는지 궁금해진다. 스스로에 대해 은밀하게 알고 있거나 미처 깨닫지 못한 우리의 복잡성과 모순, 불완전성을 어떻게 있는 그대로 진술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린 시절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농담같이, 두 번째엔 진지하게 밝힌 뒤로 친구들은 활용할 수 있는 최대치의 교양과 정신분석을 주춧돌 삼아 주인을 쉴 새 없이 해부한다.

그중 친구 공유라(강채윤)는 주인을 해독하려 하지 않는 독자적 인물이다. 성애를 쾌락으로 다루는 만화 작품을 그렸다는 미안함에 거리를 두는 유라에게 주인은 “나 진짜 괜찮아”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유라가 “너 진짜 괜찮아?”라고 반문할 때 주인은 대답하지 못한다. 화자의 언어를 순수하게 믿는 청자는 종종 ‘진짜 괜찮다’는 말을 “나는 이제 대체로 괜찮지만 때로는 아프다”는 말로 번역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수호(김정식)는 동생 누리의 몸에 생기는 멍 자국을 보며 묻는다. “어디까지가 괜찮은 거고 어디까지가 아닌 거예요?” 다른 어느 때보다 경계 없는 것을 언어로 다룰 때 그 한계는 보다 명확해진다. <세계의 주인>에서 친구들이 해석과 오독 사이를 오갈 때, 서명운동에 동참을 요구하는 장수호와 주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툼 사이에서 영화는 자칫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라는 요구(“네 동생이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될 것 같냐?”)로 향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오래된 방식으로 아직 한명의 세계는 다른 나머지에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없다.

고통스러운 진술을고통에 대한 진술로 간주하지 말라

이윤기 감독의 <여자, 정혜>는 정혜가 반복하는 정적인 모든 일상생활이 그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성폭력 피해 사건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는 비판을 받았다. 부지런히 난초 잎을 닦고 바닥에 흘린 머리카락을 모아 버리고 고양이를 주워 기르다가도 정혜는 기어코 억누르지 못한 울음을 터뜨린다. 정혜와 주인은 똑같이 사랑의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지만 다른 자장 아래에 사는 인물이다. 주인은 남자를 조심스러워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수호가 주인을 유별나고 귀찮은 반 친구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이유는 주인의 품행이 조심스럽지 못하고, 남녀 누구나와 신체접촉을 꺼리지 않으며,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주인이 성폭력을 겪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주인>에서 주인은 서사적 완결성을 떠나 보편적으로 복잡한 미완의 인간이다. 주인은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를 원망한다. 그는 또 여느 연인처럼, 다른 아이들처럼 움트는 성애와 범인류애의 희망으로 활짝 열려 있다.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주인의 과거를 재현하지 않음으로써 완결되지 않은 사과의 기억을 남겨놓는다. 주인은 트라우마 아래에서 회복 중인 사람이 아니며, 기억에 짓눌려 망각하려는 사람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농담으로 활용될 뿐이다(“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볼까요?”). 정상성이나 피해 서사의 이분법으로 트라우마 이후의 인간을 다루던 방식을 <세계의 주인>이 돌파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세계의 주인>은 우리가 주인과 미도의 세계를 엿보려 한다면 고통스러운 진술을 고통에 대한 진술로 간주하지 말아 달라고 청한다. 주인은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세번의 쪽지와 한통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앞선 쪽지가 주인을 향한 비난과 분노였다면 마지막 편지는 사과로 시작한다. 구절을 나누어 아이들이 청명하게 낭독하는 그 편지의 내용은 ‘사실은 나도 너와 같았다’는 용기 있는 고백이다. 떨리지 않는 목소리는 더 이상 주인을 판결하려는 말이 아니라 오독을 멈추고 함께 존재하려는 시도의 목소리로 들린다. 비록 온전한 이해에 가닿지 못하더라도 오직 우리의 인식의 폭으로 주인의 세계를 받아들일 때,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자리가 아니라 타인의 행복을 상상하는 자리에서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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