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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나도 너처럼, <세계의 주인> 배우 서수빈
이유채 사진 백종헌 2025-10-28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계의 주인>의 이주인(서수빈)은 하루 소모 칼로리가 얼마일지 궁금해지는 여고생이다. 학교와 태권도장, 노래방과 봉사활동 모임을 지칠 새 없이 오가며 늘 활짝 웃고 움직임도 큼지막하다. 사실 주인은 긍정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나갔다고 넘기는 과거는 그을음처럼 남아 주기적으로 비명을 지르는 시간이 없으면 버티기 힘들다. 그럼에도 장래 희망에 사랑을 적어넣으며 세상을 향해 두팔을 벌린다. 주인 역을 맡은 배우 서수빈은 <세계의 주인>이 데뷔작인 새하얀 신예다. 처음의 굴곡진 역사가 담긴 작품을 막 내놓은 그는 관객의 따스한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 총 세번의 오디션을 거쳤다고.

1차는 윤가은 감독님과의 일대일 미팅이었다. 소개팅 같은 분위기 속에서 부모님과 사이는 어떤지 태권도는 얼마나 했는지 같은 개인적인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엄마와는 절친 같고 태권도는 10년 넘게 했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20분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2차는 그룹 오디션으로, <세계의 주인>의 몇몇 신과 즉흥연기를 했다. 한 2시간쯤 했나 싶었는데 실제로는 6시간이나 걸렸다. 그만큼 빠져 있었다. 마지막 3차는 다시 감독님과의 일대일이었다. 장소가 카레 집이었는데 음식이 식다 못해 차가워질 만큼 깊이 대화했다. 그렇게 일주일간의 오디션을 거쳐 합격했고, 어떤 역할인지 모른 채 시나리오를 받았다. 다 읽은 후기를 감독님이 보내달라고 하시기에 이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어 눈물 셀피를 보냈다. 그리고 답장이 왔다. 너에게 줄 역할은 주인이라고.

- <세계의 주인>이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 플랫폼 부문에 공식 초청돼 영화제에 참석했다. 영화제 영상 속 활달한 모습이 영락없이 주인이었다. 인물에 본인을 많이 투영한 걸까.

감독님이 생각한 주인을 어서 찾아야 한다는 불안의 준비 기간이 있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주인은 이미 내 안에 있다고 용기를 주셨다. 그래서 그냥 나여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친구 역할 배우들과 충분히 리허설을 하고 친해질 시간을 주신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이들의 에너지가 워낙 좋아서 나도 덩달아 액션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 아동 대상 성범죄자가 출소 뒤 동네로 돌아오는 걸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나선 동급생 수호(김정식)에게 주인은 “너 이거 다 아는 거 아니야”라며 서명을 거부한다.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는 지점이라 긴장을 정말 많이 했다. 정식 배우도 마찬가지라 같이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서로의 대사를 바꿔보기도, 뛰면서 해보기도 하면서 툭 치면 바로 나올 정도까지 연습했다. “너 이거 다 아는 거 아니야”는 내가 즉흥적으로 한 대사다. 현장에서 감독님이 수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더 해보라는 디렉션을 주신 뒤 그 말이 툭 튀어나왔는데 오케이를 받아서 뿌듯했다.

- 후반에 다시 한번 서명을 부탁하는 수호와 몸싸움까지 벌인다. 그래도 한번 경험한 덕에 조금은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정식 배우도 나도 변함없이 떨었다. 실제 급식실에서 촬영했는데 손 놓으면 마구 굴러가는 의자를 쓰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작은 변수라는 게 우리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였는지! 둘이서 바람을 쐬며 어떡하냐고 한숨을 쉬다가 다시 대사를 맞춰보곤 했다. 촬영 때 몸싸움이 무술감독님의 예상보다도 과격했고 내 목소리는 조금만 낮춰달라는 얘길 들을 만큼 컸다. 거의 순서대로 찍은 만큼 분노가 쌓일 대로 쌓여서 격해졌다.

- 엄마(장혜진)와 단둘이 차에 탄 세차장에서 주인은 탈진할 듯 감정을 토해낸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이 신이 중요하다는 걸 직감했을 텐데 부담이 컸겠다.

모두가 이 신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했다. 촬영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감독님은 내가 이 신을 하는 걸 전체 리딩 때 한번 보신 뒤 별다른 언급이 없으셨다. ‘이렇게 중요한 신을 왜 안 시켜보시지?’ 싶었지만 부담을 털어놓았다가 진짜 감당을 못할 것 같아 혼자 연습실행을 택했다. 그리고 촬영 전날, 감독님의 긴 메시지가 도착했다. 여태 잘했고 내가, 전 스태프가 있으니 절대 걱정하지 말라고. 온 우주가 주인을 곁에서 도와줄 거라고. 그 말씀에 의지했다. 당일에 할머니, 엄마에게 전화를 드리고 슬프다는 음악은 다 들었다. 감정을 최대한 말랑말랑하게 준비했는데 현장에 가자마자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큰일 났다 싶어 내 인생의 고통을 다 꺼내봤지만 소용없었다. 내게 남은 건 이주인뿐이었다. 주인으로서 그동안 쌓아왔던 생각과 관계를 떠올리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그날 처음 완전한 몰입을 경험했다.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다.

- 주인은 각각 다른 온도를 지닌 익명의 쪽지를 네번 받는다. 어떤 쪽지 신이 가장 기억에 남나.

마지막. 시나리오대로라면 눈물이 그렁그렁해야 했는데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현장에서 감독님이 어느 문장이 감정을 건드리냐고 물으셨지만 천천히 울어보겠다고만 말씀 드리고 제대로 된 답을 못 드렸다. 그때 나는 어떤 마음이 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내겐 이 신이 신기하고 이상하고 아쉽기도 하다.

- 주인처럼 장래 희망란을 비워둔 10대였나.

가수, 피겨 선수, 군인 등 다양하게 적어냈는데 배우를 쓴 적은 한번도 없다. 초등학생 때부터 춤을 췄다. 친구들을 모아 댄스 동아리를 만들었고 고향인 울산에서 열린 최대 규모의 댄스 대회에서 3위까지 했다. 연습생 비슷한 생활도 잠시 했고. 배우에 처음 진지한 관심이 생긴 건 현실적인 이유였다. 고3 때 전공을 정해야 할 시기에 연극영화과가 눈에 들어왔다. 몸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하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바로 연기학원에 등록했으나 고민이 많았다. 연기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독립예술영화를 많이 보는 걸로 노력을 시작했다. 그 첫 작품이 바로 <우리들>이었고. 부산 영화의전당까지 가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신이 나면서도 뭉클했고, 사람을 이렇게 고양시키는 일이 있다면 잘해보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 나를 배우로 이끈 감독님의 영화로 데뷔하게 됐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 앞으로의 필모그래피는 어떤 캐릭터로 채우고 싶나.

<백엔의 사랑>의 이치코(안도 사쿠라)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케이코(기시이 유키노) 같은 여성들. 몸을 제대로 쓰는 진한 스포츠영화를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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