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이하 <레제편>) 은 시네마다. 단순히 <레제편>이 서사의 완결성이나 매력적인 캐릭터의 구성으로 획득한 감흥을 두고 영화적이란 수사를 표하는 것은 아니다. 으레 ‘영화’로 불리는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차이야 명백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현실의 풍경을 오려낸 조각이고, 곤 사토시 감독의 말마따나 애니메이션은 “모든 화면이 의도로 가득 채워지는” 세계의 전체에 가깝다. 21세기 전후 급격히 발전한 3D CG, 모션 캡처 등으로 인해 실사와 그래픽의 경계가 흐려졌다 해도 두 매체를 다루는 태도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실사영화의 카메라가 담는 현실의 우연성과 사건성을 영화 고유의 가치로 설파하는 연출가들이 지지를 얻고 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다만 <레제편>은 이제 정말, 영화만이 가졌던 ‘물리적인 카메라’의 성질이 비로소 ‘관념적 촬영’의 영역과 구분 불가능할 정도로 뒤섞인 것 같단 감상을 자아낸다. 아니, 애초에 실사 카메라의 우연성이 지나치게 우상화되었던 것은 아닌지란 의문마저 들게 한다. 숏 하나하나의 리듬과 몽타주의 충돌을 체계화했던 세르게이 에이젠시테인, 숏의 엄밀함을 통해 배우의 얼굴마저 조작했던 로베르 브레송의 사례를 떠올렸을 때 작금의 애니메이션이 실사영화의 촬영, 편집과 어떠한 질적 차이를 지니는지, 두 매체 사이의 존재론적 위계가 여전한지 재고할 만하다.
<레제편>은 화면비의 적절한 활용, 벡터의 일관성, 프레임 속 피사체의 전략적 배치라는 명확한 시각적 비전과 영화적 형식미를 관철한다. 이를 포착하기 위해선 원작 만화를 함께 언급할 필요가 있다. 원작자인 후지모토 다쓰키의 스타일을 흔히 영화적이라 평하는 근거는 그가 애용하는 벡터, 피사체 배치의 전법에 있다. 벡터란 영상에서 관객의 시선을 특정 방향으로 이끄는 힘의 작용을 뜻한다. 전술한 브레송의 설명을 빌리자면, 영화는 바람의 형체를 보여줄 순 없어도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를 보여줄 순 있다. 여기서 갈대가 휘날리는 방향이 바로 벡터다. 관객은 그 벡터에 따라 눈을 움직이고 ‘설명하지 않아도 보이는’ 영화의 시각적 내러티브를 수용한다. 이에 따라 연출자가 의도한 이미지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 여백을 사유한다.
덴지와 마키마가 극장에서 나와 밤의 도로를 걷는다. 마키마가 갑자기 덴지의 품에 안기고 돌아 걸어간다. 이때 마키마가 걷는 방향은 왼쪽, 이에 따라 덴지가 바라보는 시선도 왼쪽, 덴지 뒤를 지나가는 자동차의 머리도 왼쪽을 향한다. 기본적으로 영화의 우→좌 벡터는 인간의 인지적 편안함보단 불편함을 안기는 방향성이다. 더하여 작가는 덴지가 마키마를 바라보는 왼쪽 공간, 즉 루킹룸을 오른쪽보다 좁게 그려 시각적으로 답답한 프레임을 형성한다. 인지적인 역행의 벡터와 불안한 여백으로 덴지의 심적 동요와 둘의 불가능한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만화의 영화적 단서를 애니메이션은 탁월하게 영상화한다. 왼쪽으로 나아가는 마키마와 그를 쳐다보는 덴지의 모습을 시네마스코프의 롱숏으로 잡아내어 신의 황망한 정서를 강조하고, 후경에 있는 대개의 자동차와 행인들이 움직이는 방향까지 왼쪽으로 정렬하여 장면 전반의 형식적 통일감을 지킨다. 원작이 구사한 벡터와 프레임 전략을 극대화한 것이다.
더하여 <레제편>은 덴지와 레제의 관계 일변을 시각적 내러티브로 증명한다. 처음 덴지와 레제가 전화 부스에서 만나기 전, 도로를 걷거나 뛸 때 그들은 대개 우→좌의 어색한 벡터로 움직인다. 이어지는 전화 부스와 카페 시퀀스에서 레제는 프레임의 왼쪽에, 덴지는 오른쪽에 자리한다. 카페에서 덴지를 유혹하는 레제는 자꾸만 덴지쪽으로 움직이며 화면의 좌→우 벡터를 유도한다. 그 결과, 두 사람의 감정이 무르익은 밤의 학교-수영장 시퀀스에서 둘의 방향성은 레제의 의도대로 뒤바뀐다. 학교에 들어설 때부터 둘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안정된 벡터를 형성한다. 학교 이전과 반대로 프레임의 왼쪽엔 덴지가, 오른쪽엔 레제가 배치된다. 둘의 관계와 감정 변화(덴지가 레제를 진정 좋아하게 되는)를 이미지로 가시화한 것이다. 두 사람이 교실에서 칠판에 적힌 문제를 맞힐 때 애니메이션은 원작에 없던 앙각의 롱숏까지 추가하여 덴지가 왼쪽, 레제가 오른쪽에 있다는 시각적 일관성을 더욱 강조한다.
이후 레제가 덴지의 혀를 뜯고 변신하여 그를 쫓는 서사적 반전이 진행된다. 이에 맞춰 시각적 구도 역시 뒤집힌다. 왼쪽으로 도망가는 빔과 덴지를 레제가 따라가면서 작품의 주된 동작 벡터가 우→좌로 변한다. 이어지는 전투 장면 내내 둘의 좌우 위치는 학교 시퀀스와 반대다. 덴지가 차 지붕을 뚫고 레제와 대면할 때, 빌딩의 창문에 매달려 빔을 기다릴 때, 물에 레제를 끌어들이려 서 있을 때도 항상 레제는 왼쪽, 덴지는 오른쪽에 있다. 전투가 끝난 뒤 이들이 아침의 바다에서 깨어났을 때, <레제편>은 기막힌 연출 수완을 발휘한다. 모래사장 방향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롱숏을 통해 다시금 덴지가 왼쪽에, 레제가 오른쪽에 있도록 촬영한 것이다. 덴지가 레제를 용서하고 둘의 마음이 접합됐음을 지시하는 이미지다. 원작엔 없던 앵글이다. 일어선 레제는 내일 카페에서 만나자는 덴지의 말을 뒤로하고 오른쪽으로 걷는다. 레제가 (밤의 학교 시퀀스 때처럼) 덴지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을 것이라 예견하는 복선의 좌→우 벡터다.
레제는 덴지를 만나러 카페로 가는 골목에서 마키마에게 저지당한다. 여기서 <레제편>은 카페 안 덴지의 뒷모습을 보는 레제의 시점숏으로 본편을 끝낸다. 오프닝곡이 흐르기 전, 흑백의 러프 스케치로 그려진 덴지의 꿈은 정방향에 가까운 좁은 화면비였다. 이후 오프닝이 끝나고 덴지가 꿈에서 눈을 떴을 때 시작된 2.39:1의 시네마스코프 비율은, 레제가 덴지를 일방적으로 보는 구도에서 종료된다. 엔딩크레딧 이후의 화면은 16:9에 가까운 스탠더드 비율이다. 즉 <레제편>은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에서 일어났던 덴지와 레제의 서사를 오프닝, 엔딩과 구별된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보존해준다. 둘의 사랑이 덴지의 시선으로 시작하고 레제의 시선으로 끝난 한편의 (시네마스코프) 영화라고 매듭짓는 것이다.
영상의 서사를 이미지의 형식과 적절히 조화한 사례는 근래 들어 블랙박스와 화이트 큐브를 넘나들고, 영화 매체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현대 영상-영화들의 양태보다 외려 고전적인 영화의 방식으로 느껴져 반가울 정도다. 서두에 언급한 디지털 그래픽의 역량이 이제 생성형 AI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인간의 창작이 건드릴 수 없다고 여기던, 마술적 장소로 성역화되던 인간의 얼굴마저 언제고 정복당할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의 역량을 물리적 카메라의 존재, 현실 속 우연의 포착으로 전제하며 실사영화의 틀을 닫는 것이 과연 영화 매체를 지키는 일일까. <레제편>은 우연을 잡아내고 현실을 조각내는 카메라 없이도 영화 촬영의 관념적 준거를 유지하며 시각적 내러티브의 매혹을 자아낸다. 요컨대 실사와 그래픽이란 틀을 거둬내고 봤을 때 그저 ‘잘 찍은 영화’다. 이를 시네마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이 영화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