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속도나 볼거리가 더 이상 관객을 놀라게 하는 요인은 될 수 없다고 짐작되는 시점에, 나아가 동시대 영화가 소생하는 유일한 혁명 전술은 느린 시간의 복원에 있다고 믿기 좋은 때에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가 요동치고 질주한다. 나는 이 미국영화의 게릴라전에 놀라 보기 좋게 엎어졌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끝날 때까지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근자에 피로를 유발한 속도감의 의미가 극단적으로 협소해져 있었음을 무망히 깨닫는다. 인물들이 걷고 달리고 날고 하물며 춤추면서까지 저마다의 신랄한 보법을 구사하는 동안, <역마차>(1939) 시대부터 축적된 미국의 과오는 머슬카 시대의 사회정치로, 파시즘적 그림자를 드리운 미국의 현주소로 흐른다. 필요한 것은 정확한 방향감각과 탁월한 편집의 운동술이었을 뿐 이미지의 질주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 영화를 향한 열렬한 반응은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와 우리 사이의 시차가 이토록 가까워진 지금, 고장난 줄 알았던 기계(영화)에서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한 멜로디를 감지한 혁명가들(관객)의 수신호일 것이다.
대안적 1990년대, 미국의 군사·자본·이민법에 저항하는 혁명 집단인 프렌치 75의 급진적인 행동주의는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의 첫 질주 장면에 응축된다. 전속력의 달리기와 그것을 좇는 카메라의 풍요로운 흔들림은, 급습과 후퇴를 일삼는 무장 혁명 세력이 분사하는 쾌감의 모서리가 자기파괴의 비장미로도 물드는 순간까지 동행한다. 그에 반해 영문도 모른 채 일단 시키니까 폭죽부터 터뜨리고 보는 사제폭탄 전문가 게토 팻(리어나도 디캐프리오)에겐 동일 집단이 한층 오합지졸로 보이게 하는 신묘한 미덕이 있다. 남자는 조직의 배신자로 전락한 퍼피디아를 잃고 밥 퍼거슨이라는 새 이름으로 살아간다. 혁명의 잠정적 종식 이후 16년. 다시 딸을 노리는 스티븐 록조(숀 펜)에 대항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 아버지는 혁명은커녕 핸드폰 배터리 충전이 시급해 종종거릴 정도로 무력하다. 조직의 보호를 필요로 하나 오래전 암구호를 잊어버린 그의 사태는 달리 말해 구호뿐인 혁명에 가담했다고 자조하는 세대의 유머도 된다. 실패한 아버지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일종의 서커스를 담당하면서 희극성이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의 녹슬지 않은 연료임을 과시한다. 한편 이제는 낡고 우스꽝스러워진 혁명이 새 세대에게 도착하기 전에 바통을 이어받아 뜻밖의 스퍼트를 내는 인물도 있다. 박탄 크로스의 낡은 아파트 복도에서 주도면밀한 탈출과 은신의 동선을 주도하는 동시에 주인공의 과호흡도 다독이는 ‘사부’ 세르지오 생카를로스(베니치오 델 토로)다. 장기 생존한 혁명가에게 깃든 초연함이 마침내 사랑스러운 춤사위로 이어질 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헌사를 보내는 이들의 맨얼굴이 불현듯 수면에 비치는 것만 같다. 그를 따라 밤의 그림자처럼 춤추는 젊은 스케이트보더들의 무리도 함께 날아오른다. 물론 이 아름다운 몸짓을 좇다가 삐끗하고 마는 중년의 추락까지 장면의 운동을 가속하는 요인임은 틀림없다. 결승선을 장식하는 시퀀스는 혁명의 스타일보다 실리가 중요해진 새 세대 윌라(체이스 인피니티)가 차를 멈춰 세울 때 대미로 향한다. 추격전에서 추격을 멈추고, 근경과 원경의 가능성을 위아래의 상하운동으로 뒤바꾼 순간에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소생을 꿈꾼 두 가지 테제 또한 명확해진다. 첫 번째, 혁명은 흐른다. 두 번째, 우리는 현실의 운동 원리를 재조정하는 영화의 운동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영화를 보며 중얼거렸다. 혁명은 촉각적인 것이다. 초망원렌즈로 촬영해 인물과 주변 환경 사이의 거리를 압축한 영화의 화면은 공기의 밀도가 물리적으로 감지되는 듯한 착각을 안긴다. 달리고 뛰는 모든 환경이 숨 막힐 정도로 인물과 밀착해 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주는 움직임의 감흥은 화면의 압력을 인위적으로 형성한 뒤 거기 지지 않는 속도와 분주한 동선으로 대응하는 인물을 좇는 악취미에서 발생한다. 촬영감독 마이클 바우만의 말이 정확하다. 인물들은 “세상을 통과하기보다는 맞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더 극적 어조를 보태면 어떨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누구도(지하 요새에 둘러앉은 백인 우월주의 집단의 권력자들을 제외하고) 세상을 통과하지 못하고 힘겹게 겨룬다. 하물며 악역조차도. 스티븐이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심문을 통과한 뒤 일직선의 호텔 복도를 빠져 나오는 장면, 뻣뻣한 걸음걸이도 숨기지 못하는 감정이 비죽 드러난다. 억압된 페티시와 분열된 욕망으로 그려진 남성성이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의 적역이라면 스티븐은 지도의 변방쯤에 이름을 올릴 만한데, 특히 이 순간만큼은 그 눈물의 진의를 넘보고 싶어진다. 마침내 이룩한 성취에의 쾌감일까 몸이 반응하는 끔찍한 자기혐오일까, 혹은 둘 모두? 카메라가 눈가에 고인 물기마저 하나의 움직임으로, 역동으로 담아낸 찰나에 보는 이의 상상력은 깊이감이 무섭도록 압축된 공간 너머까지 향한다.
마지막 전투의 가속도가 아직 남아 있는 시점에 자신만의 길을 떠나려는 윌라가 밥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준다. 오래전 밥 퍼거슨이 그 작동 능력을 심히 의심하면서도 딸에게 트러스트 디바이스, 이른바 믿음의 기기를 전수했을 풍경이 역전되는 셈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일종의 바통처럼 활용하는 이 오래된 물건은 알려준다. 하염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어달리기 와중에 언젠가 때가 오면 반드시 다음 주자를 믿어야만 한다고. 그러려면 우선 서로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적시에 과감히 행동해야 한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믿음의 기기가 처음 작동하는 장면의 훌륭한 대리인으로 현대 미국영화에서 가장 정감 가는 선의의 얼굴 중 하나라고 정의해보고 싶은 배우 리자이나 홀을 기용했다.) 나아가 이 믿음의 이어달리기는 미국의 무의식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설파한다. 스티븐의 지시로 윌라를 차 뒷좌석에 납치한 뒤 목적지까지 운반한 아메리카 원주민 살인청부업자가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는 장면에서 그는 잠들었다가 되살아난 자기 안의 멜로디를 듣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먼 곳에서 날아온 어느 그리운 배신자의 편지가 알려주듯 “그린 에이커스, 베벌리 힐빌리스, 후터빌 정션!”의 응답 구호는 이제 실패한 혁명의 유산이 됐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실패와 망각 이후에도 다시 주파수를 맞춰나가는 율동과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는 미약한 멜로디에 관한, 황홀하게 거창한 영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