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엄마랑 통화를 했다. 추석 연휴 내내 공연과 촬영 일정이 겹쳐서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 있을 참이었는데, 마침 촬영 일정 한두개가 취소되는 바람에 통화라도 할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엄마는 “아이고, 네가 시간이 좀 나서 이렇게 통화를 길게 하니까 너무 좋다”고 했다. 통화가 길게 길게 이어진다.
“동네에 크고 좋은 노인복지관이 생겨서 회원증을 만들었거든. 나중에 집에 가서 살면 새벽기도 갔다가 수영장 갔다가 복지관 가서 노래 부르고 복지관에서 3천원짜리 점심 사먹고 오후에는 친구들하고 차 마시면서 놀 거야. 저녁에는 밥해서 냉동실에 얼려놨다가 그거 하나씩 녹이고 반찬은 사다가 먹을라고, 밥 안 해 먹게.”
엄마는 10여년 전 조카가 태어나면서부터 주 5일은 언니 집에 머물며 조카를 돌보고 주말에만 당신 집으로 돌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
“언제부터 다닐라고?”
“◯◯ 대학교 갈 때까지는 봐주고.”
“세상에! 그럼 아직 6년이나 남았는데 벌써 회원증을 만들었어?”
불현듯 익숙한 슬픔이 밀려온다. 누군가 소소한 미래를 꿈꾸는 것을 보거나 듣는 순간, 나는 습관처럼 뭉근한 슬픔을 느낀다. Mortality. 언젠가는 죽어야 함, 죽음을 피할 수 없음, 필사. 이 영어 단어를 언제 처음 알았을까. 중고등학교 시절 영어 단어장에서 봤을까? 대학 때 멋으로 들춰본 영어 소설책에서 봤을까?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그날 이후 이 단어는 그야말로 나를 사로잡았고, 예외 없이, 예고 없이 반드시 죽는다는 필사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 존재에 대한 습관성 연민과 슬픔을 갖게 되었다. 이번 경우엔 호르몬의 농간도 얼마간 작용한 것 같기는 하지만.
엄마는 깔깔 웃으며,
“친구가 같이 만들자고 해서 만들었어. 수영 같이 다닌 친구야. 내가 수영장 안 다닌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나를 그렇게 챙겨준다니까.”
“고마운 사람이네.”
“고맙지. 저번 김장 때 와서 도와줬다는 그 친구야.”
“아~ 그 친구 분!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
“나보다 네살 아래야. 자기는 요새 사교댄스 다닌대. 재밌다고 같이 다니자는데, 나는 라틴댄스 한다고 했어. 영감탱이들 없는 데로 가야지.”
“엄마, 라틴댄스도 영감탱이들 있지 왜 없어. 라틴댄스쪽은 아주 골반을 돌려버리지.”
“그래?”
엄마는 평생을 직장 생활 하며 아버지 뒷바라지에 딸 넷을 건사하느라 친구 없는 사람으로 살았다. 그러다 건강 신봉자였던 아버지가 뜻밖에 이른 나이, 63살에 암으로 돌아가시자 처음으로 수영장에서, 교회에서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도 “퇴직하고 나면 보온병에 뜨거운 물 받아가지고 컵라면 사서 니기 아부지랑 등산 다닐라고 했는데”라며 아쉬워하곤 했다. 그때도 나는 ‘Mortality’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것 같다.
“엄마, 언니가 벌써 마흔일곱이야. 낼모레 쉰이야. 이게 말이 돼?”
“그러니까. 나는 니기 언니 서른 몇살인 줄 알았다.”
“엄마가 몇 살이지?”
“…70.”
“맞아. 엄마랑 나랑 스물다섯살 차이야.”
“나는 전에는 노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실실 쓰레기나 줍고 하면 나라에서 20만원씩 주는 게 이해가 안 갔거든? 다른 데 더 필요한 데 쓰지 하면서? 근데 이제 이해가 가. 그 사람들 젊었을 때 정말 어렵게 살았잖아. 어려운 환경에서 그야말로 자식들 키우느라고 한평생을 다 허비해버렸잖아. 그 정도는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것 같애.”
“그러니까….”
나는 엄마가 자식들 키우는 이야기 뒤에 ‘한평생을 허비했다’는 표현을 써서 약간 뜨끔했다. 사실 좀 전에, 집으로 돌아가면 밥을 다 사먹겠다고 했을 때도 그랬다. 나는 엄마가 매년 겨울 김장하고 철철이 좋은 과일 나오고 맛있는 반찬 만들면 서울로 올려보내는 게 힘들어도 낙일 거라는 걸 의심해본 적이 없다. 엄마가 주문처럼 “신록이 니는 서울대 간 걸로 나한테 효도는 다 한 거야”라고 말했을 때도 그게 진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어쩌면 그것도 허비해버린 지난 삶에 대한 자기합리화의 주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엄마가 학교에 수업 참관을 왔을 때, 학생들이 탤런트 왔다고 우르르 몰려들었었다. 그 정도로 엄마는 그 시절 어른 여자치고는 키도 크고 얼굴도 예뻤다. 서울 사는 시누이가 보내준 검은색 투피스 양장을 입고 왔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참 예뻤다. 그때 엄마 나이가 아마 서른 중반쯤이었겠다. 엄마는 나랑 스물다섯살 차이가 나니까.
고등학교 몇 학년 때였던가. 수학 선생님이 학년 초부터 입버릇처럼 실없는 농담을 했는데, 그 농담은 ‘내일모레면 크리스마스에요’였다. 우리는 허무개그 듣듯이 그냥 어이없어했는데, 정말 찬바람이 불고 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서는 ‘내일모레면 크리스마스에요’라는 농담에 다 같이 울상으로 ‘흐응~~~~’ 하고 반응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한해가 다 가버렸어!!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어떡해…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같은 마음이었겠지. 그날 이후로 우리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냥 매일 똑같이 살았고, 수학 선생님의 농담에 ‘흐응~~~’ 하고 울상을 지었고, 뭐라도 해보려고 ‘으쌰!’ 했다가 그냥 도로 말았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고 마흔이 넘어 일흔이 된 엄마랑 통화를 하다가 이 글을 쓰고 있다. 삶이 끝나간다. 이 글을 쓰고 읽는 우리 모두. 이 글을 쓰고 읽는 우리 모두의 옆 사람, 뒷사람, 앞사람 모두 어쩌면 지금은 멀게 느껴져도 언젠가 문득 ‘흐응~~~’ 하고 울상을 지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알아도, 나는 이번 추석에 공연 때문에 촬영 때문에 고향에 안 내려갈 거고, 엄마는 조카가 대학에 갈 때까지는 복지관에 안 갈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루하루의 삶은 죽을 운명에 맞설 만큼 이토록 힘이 세다. 일상이란 필사의 운명을 망각하려는 삶의 지혜일까, 아니면 필사의 위력에 맞서려는 인간의 속절없는 분투일까. 그것도 아니면 필사의 슬픔을 이기는 생의 기쁨일까? 어쩌면 필사의 두려움 앞에서 필사적으로 파고드는 신체적 피난처일 지도.
거대한 해일이 집을 덮치고 아이들의 놀이터를 덮치고 원자력발전소를 덮쳤다. 그날 이후 헤이즐과 로빈 부부는 발전소 주변의 출입 금지 구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안가 오두막을 임시 거처 삼아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 발전소에서 핵물리학자로 근무하다 은퇴한 뒤 발전소 근처에서 여생을 보내던 중 재난을 당했다. 어느 해질녘,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는 두 사람의 해안가 임시 거처에 로즈라는, 젊은 시절 발전소에서 함께 근무했다 최근 몇년간 연락이 끊겼던 오랜 친구가 찾아오면서 극이 시작된다. 서촌의 ‘abnomal 필운’에서 공연한 연극 <아이들>(극단 돌파구) 이야기다.
로즈에게 헤이즐은, “이 지역을 완전히 떠나는 건, 왠지 의리 없는 것 같아서”라며 여전히 금지 구역 근처에 살고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매일 집에 들여오는 음식과 물, 기타 물품들에 방사능 측정기를 가져다 대는 삶을 살면서도 헤이즐은 요가를 다니고 샐러드를 만든다. 남편 로빈은 피난 나올 때 축사에 두고 온 소들을 돌보러 매일 피폭된 예전 집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사실 그 소들은 피난 나온 다음날 방문했을 때 이미 모두 죽어 있었고, 로빈은 그저 매일 그곳으로 돌아가 죽은 소들을 묻어줄 구덩이를 파고, 트랙터로 사체를 옮기고, 흙을 덮고, 추도사를 읽는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왜 갑자기 찾아왔냐는 부부의 질문에 로즈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발전소에서 사고를 수습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 즉 ‘아이들’을 대신해서 은퇴한 60대 이상의 기술자들이 그곳으로 돌아가 사고 처리를 전담하기로 했다면서, 두 사람에게 함께 발전소로 들어갈 것을 제안한다. 이미 금지 구역 안의 축사를 들락거리며 피폭된 로빈은 고민 끝에 발전소로 들어가겠다고 결정하고 짐을 꾸리지만, 외할머니가 103살까지 잇몸도 무너지지 않고 머리도 빠지지 않은 채 건강하게 살다 돌아가신 장수하는 모계 유전을 타고났다고 확신하는 헤이즐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관계에 대한 원망, 딸에 대한 걱정, 남은 삶과 건강에 대한 애착, 암과 병에 대한 두려움, 죄책감을 심어주는 로즈의 제안에 대한 혐오와 불신 등으로 점철된 짧고 격렬한 혼돈의 시간이 지나간다.
마침내 헤이즐은 로빈과 로즈를 금지 구역 입구까지 데려다줄 택시를 부르고, 전화를 끊기 전에 어쩌면 셋이 갈 수도 있지만 아직 모른다고, 돌아 나오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태워 올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헤이즐은 로즈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이 시간에 하는 일이 있는데… 매일 하는 일이 있거든. 지금 좀 늦었는데, 지금 하지 않으면 내일 좀 힘들어질 것 같아서”라고 말하고 요가 매트를 펴고는 정성 들여 태양을 향한 경배 동작을 수행한다. 무대가 서서히 어두워진다. 자기 세대의 과오와 다음 세대의 생명을 묻는 거대한 윤리적 질문 앞에서, 죽음을 담보로 한 결정을 앞두고, 헤이즐이 요가를 한다, 여느 밤과 다름없이. 들이마시고, 내쉬고,
암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