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즉시 되돌아갈 것. 이상 현상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갈 것.” <8번 출구>의 세계관은 아주 간단하다. 동명의 인디 게임이 설정했던 규칙을 고스란히 따왔다. 평범해 보이던 지하철역의 통로로 진입하면, 어느 순간 비현실적인 공간이 나타난다. 백색 형광등으로 밝힌 이 통로는 앞으로 가도 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무한루프’의 밀실이다. 그 많던 역내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고, 무한히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걷는 남자’(고치 야마토)만이 존재한다. 무한루프에 갇힌 이는 통로 내의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서두에 명시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규칙을 지키는 데 계속 성공하면 0번 출구, 1번 출구, 2번 출구에 이어 8번 출구까지 당도하고, 비로소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다만 중간에 한번이라도 규칙을 어길 시 0번 출구부터 게임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영화의 주인공 ‘헤매는 남자’(니노미야 가즈나리)는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출근길 오전, 이 무한루프의 지하도에 갇히게 된다. 그는 게임 규칙에 따라 8번 출구로의 탈출에 애쓰고 그 과정에서 공간이 주는 공포, 자신이 간직해왔던 여러 내적 고민을 마주하게 된다. 이처럼 영화 <8번 출구>는 무척이나 간소한 원작 게임의 설정을 빌려오는 동시에, 장편영화를 이끌 만한 서사적 동력을 작중에 부여하고 게임과 영화 사이의 틈을 교묘히 섞어내는 연출의 영리함을 선보인다.
플레이어인 듯, 관객인 듯
영화가 시작하면 헤매는 남자는 만원의 지하철에 있다. 다만 이때까지 관객은 영화의 주인공이 누군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다. 대신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비추지 않고 1인칭 시점숏(POV)을 구가하며 관객이 마치 비디오게임의 플레이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지하철 유리창에 살짝 비친 주인공의 모습이 잠깐 드러나지만, 그것 역시 주인공의 POV숏이므로 딱히 3인칭의 감각을 주진 않는다. 이 시점에 따라 관객은 주인공이 보는 스마트폰의 SNS를 함께 바라본다. 그 속엔 유전자조작으로 기이한 형체를 갖게 된 실험용 쥐의 모습, 수해로 어느 마을이 풍비박산난 콘텐츠 등이 재생되고 있다. 이어서 카메라는 지하철 내의 풍경을 제시하는데, 이곳에서도 시끌벅적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한 중년 남성이 아이와 함께 있는 여성에게 “아이를 태우고 지하철에 타는 건 민폐”라며 윽박지르는 모습이 그려진다. 다만 주인공은 이 소란에 개입하지 않고 지하철을 나선다. 바로 이 순간이 게임과 영화의 차이가 크게 두드러지는 순간이다. 어떠한 사건(이벤트)에 개입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게임이었다면 플레이어에게 주어졌을 선택의 기회가 소거되고 영화는 주인공 헤매는 남자의 서사에 따라 지하철 바깥으로 이동하게 된다.지하철을 나선 헤매는 남자에게 전화 한통이 걸려온다. 얼마 전 헤어진 연인(고마쓰 나나)이 지금 병원에 있으며,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한다. 헤매는 남자는 병원에 갈 수 있도록 일을 조정해보겠다고 말하고 더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기의 전파가 끊기고, 사람들이 사라진다.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대략 1분이면 지나갈 수 있는 한 지하도의 풍경이다. 이내 헤매는 남자는 자신이 기이한 무한루프의 공간에 갇혔음을 인식한다. 게임의 공간이 주는 공포감, 얼른 전 애인과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초조함, 일터에 늦지 않을까 걱정하는 현실의 조급함, 시청각적으로 본능적 두려움을 자아내는 온갖 장치들이 헤매는 남자를 압박한다. 8번 출구의 호러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공포의 공간을 공포의 출구로
원작 게임 <8번 출구>는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서브컬처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대표적 사례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진 리미널 스페이스란 한국어로 ‘문턱 공간’, ‘경계 공간’이라고도 번역되는 용어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사람이 있어야 할 공공장소에 인적이 없고, 이에 따라 인간이 구축한 ‘공공성’의 안전감이 희박해지는 공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도심 속 지하철, 길거리, 상가, 엘리베이터 등 사회적으로 약속된 통로로 기능하던 공간에 사람의 존재가 사라진 순간, 우리는 인지적인 불편함과 낯선 공포를 마주하게 된다. <8번 출구>가 서사의 주요 공간으로 설정한 지하철역의 텅 빈 지하도 역시 대표적인 리미널 스페이스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겉보기엔 영화 <8번 출구>도 게임이 활용한 리미널 스페이스의 감각을 기본적으로 호러의 근원으로 사용하는 작품처럼 보인다.
다만 영화 <8번 출구>가 주는 공포의 방향성은 게임과 조금 다르다. 게임 속 리미널 스페이스가 주는 공포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에 사람이 없다는 감각’이고 8번 출구로의 탈출은 미션 클리어라는 성취의 쾌감을 플레이어에게 안겼다. 반면에 영화 <8번 출구>의 주요한 공포심은 ‘8번 출구로 나간다고 해도, 다시 사람이 있는 곳에 돌아가야 한다’라는 순환적 공포에 가깝다. 앞서 말했듯 헤매는 남자가 지하도에 들어서기 전 속해 있던 도쿄 지하철은 사람들이 있어봤자 전혀 본인들의 인간성을 발휘하지 않는 장소였다. 헤매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리미널 스페이스의 지하도는 헤매는 남자가 개인적·사회적 ‘공포’라고 인식했으나 직시하지 않았던 현실의 문제를 더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곳으로 기능한다. 일상의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던 자신의 죄책감을 마주하는 구원의 통로이기도 하다. 영화의 초반, 헤매는 남자가 SNS로 스와이프하며 가볍게 목격하던 유전자조작의 실험체, 수해의 두려움 등은 지하도의 이상 현상으로 전환되어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피해로 다가온다. 전 애인과 얽힌 개인사의 고심도 이상 현상의 일종으로 나타나 더 깊은 인간적 고민을 초래한다. 이야기의 중반부터 만나게 되는 지하도 속 미지의 소년(아사누마 나루) 역시 헤매는 남자의 내적 고뇌를 자극하는 촉매로 작동한다. 헤매는 남자는 우리가 흔히 공포의 근원이라 여겼던 리미널 스페이스에 들어선 뒤에야 비로소 공포를 이겨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8번 출구>가 POV숏의 촬영 방식이나 원작 게임의 설정에 기대어 게으르게 영상화된 작품이 아님을 뜻한다. 게임과 영화가 목표할 수 있는 공포의 벡터를 적확히 인식한 뒤, 교묘하게 혼합하고 뒤틀어 영화만의 고유함을 획득했다. 게임적 쾌감에 지나치게 몰두하거나, 거꾸로 서사 매체의 스토리텔링에 매몰되지 않고 적절한 균형감각을 유지한 것이다. <엘든 링><데스 스트랜딩><메탈 기어><헬다이버즈>등 <반지의 제왕>을 방불케 하는 대서사시 판타지부터 무한루프의 특성으로 플레이의 중독성을 자아내는 게임들이 곧 영화화되어 우리를 찾을 시점, <8번 출구>는 그들이 참고해야 할 꽤 유효한 성공 사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