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씨네21상’은 손경수 감독의 첫 장편 <아코디언 도어>에 돌아갔다. 씨네21상은 <씨네21>이 후원하는 상으로 비전부문에 오른 한국 작품 중 독창성과 가능성을 두루 갖춘 1편에 주어진다. <아코디언 도어>의 비상함은 절박한 자기 탐색과 과감한 이미지 실험에서 온다. 중3 지수(문우진)는 9살 때 ‘재능’이 몸속에 들어온 뒤부터 글을 잘 쓰게 되지만 그것이 전학을 온 축구선수 현주(이재인)에게 옮겨가면서 격랑을 겪는다. 재능에 관한 고민은 현실과 환상의 공간을 오가며 확장하고 의외의 폭발, 과잉, 단절의 숏을 통과해 깊어진다. 건국대학교와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손경수 감독이 창작자로서 겪은 성장통이 고스란히 스민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인터뷰를 위해 특별히 ‘재능’과 같은 디자인의 넥타이를 구해서 매고 왔다는 그는 영화처럼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 “이제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는 마지막 답변에서 그가 헤매더라도 이곳에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 문우진 배우가 올해의 배우상까지 받으면서 2관왕을 했다. 수상의 기쁨을 어떻게 나눴나.
고1인 우진 배우가 중간고사 기간이라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받은 트로피를 사진으로 보여줬는데 정말 좋아했다. 내 트로피는 집에 잘 모셔뒀고 김진형 촬영감독을 포함한 고마운 분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씨네21상은 내가 스스로 잘하고 있는지 의심하는 와중에 받은 상이라 감사한 마음이 크다.
-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보낸 쉽지 않은 시간이 <아코디언 도어>의 토대가 됐다고.
영화과에서 단편을 만들던 시절에는 난해하고 모험적인 걸 지향했다. 그걸 밀어붙인 <메신저><우주비행사들>이 높은 경쟁률을 뚫고 여러 영화제에 초청받으면서 나는 된다고,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들어가서 장편을 준비해보니 장편은 실험과 도전만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갈피를 못 잡는 시간이 길어지는 동안 동기들은 성과를 냈다. 그들에 대한 부러움과 스스로에 대한 판단이 틀렸다는 불안감 등 나를 괴롭히던 각종 질문과 잡념이 아이러니하게도 첫 장편이 됐다. 2018년에 아카데미 졸업 뒤 이번에는 아카데미의 사전제작과정을 통해 <아코디언 도어>를 완성했다.
- 주요 인물을 비슷한 상황의 또래 창작자 대신 10대 청소년으로 내세운 이유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며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생각을 달고 사는 사람인데, 이런 고민을 30대 성인 캐릭터가 하면 유치할 것 같았다. 몇년째 중학교에서 단편영화 제작 수업을 하고 있는 영향도 크다. 아이들을 보며 떠올린 내 중학생 시절의 모습이 더해져 지수가 만들어졌다. 현주는 처음부터 축구선수였다. 글 쓰는 예민한 소년과 대비되게 자유분방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소녀였으면 했다.
- ‘재능’ 크리처는 지렁이를 닮았다. ‘재능’에게 화려하게 가도 될 만한 능력이 있음에도 단순한 실루엣을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동네에서 구조한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된 지 얼마 안됐을 때였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고양이가 평소보다 더 크게 울더니 토를 확 하더라. 토사물 안에 매끈한 몸을 가진 지렁이 한 마리가 섞여 있었다. 너무 징그러웠지만 어쩌겠나. 그걸 치울 사람은 아빠가 되기로 한 나뿐인걸. 그 와중에 병원에 보여주려고 영상으로 찍었는데, 그 꾸물꾸물한 움직임이 ‘재능’을 디자인할 때 떠올랐다. 그것과 지수와의 첫 만남 장면은 <에이리언>처럼 보였으면 했다. 옆에서 숙주와 대치하던 그것이 지수의 귓속으로 쏙 들어가는 순간 관객에게 호기심이 일 거라고 생각했다.
- 돋보이는 영상 실험은 지수가 꿈속 축구장에서 “돌려줘”라 말하는 현주와 9살의 자신을 마주한 뒤부터 얼굴이 풍선처럼 부풀어 터지는 순간까지다. 연출자가 재밌어하는 게 느껴졌다.
꿈은 디스크 조각 모음 같다. 자기 전까지 경험한 크고 작은 일들이 한데 뭉쳐진다. 이날 지수는 단짝 종현(김건)과 풍선 터지는 걸 봤고 현주에 대해 생각했고 늘 그렇듯 불안하기에 그런 꿈을 꾼 것이다. 영화 전체를 물이 일렁이는 듯한 느낌으로 설계했는데, 이 시퀀스에서는 조명으로 그걸 마음껏 표현할 수 있었다.
- 원고지 카드는 독특한 장치다. 원고지 한면이 된 화면에 지수의 상념이 텍스트로 새겨진다.
어떻게 하면 내레이션이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떠올린 방식이었다. 내레이션 쓰는 걸 좋아하지만 그걸 영화에 자연스럽게 붙이는 게 늘 어렵다. 어느 날 해외영화를 보다가 문득 내레이션을 자막처럼 화면에 박아버리면 간지럽지 않고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전영화를 공부하면서 인터 타이틀이 흥미롭기도 했고. 문장을 하나하나 직접 쓴 원고지를 스캔해서 카메라에 붙였다. 글씨는 우리 팀 중 가장 명필인 임수진 미술감독이 주로 맡았고, 나와 다른 스태프들도 한줄씩 나눠 썼다. 결말 부분엔 지수의 내레이션을 온전히 넣었다. 관객에게 큰 울림을 주었으면 해서 문구를 여러 번 다듬고 편집도 고심했다.
- 지수와 현주가 힘내려고 먹는 초콜릿과 같은 에너지원이 있다면.
나 역시 초콜릿. 그리고 냉면과 커피.
- 대학 전공으로 영화과를 택했다. 10대 때부터 영화감독을 꿈꿨나.
성적으로 갈 수 있는 예술학과를 찾다가 입학한 경우다. 어릴 땐 영화와는 아주 멀었다. 그림과 음악을 좋아했고, 단편소설을 쓰거나 시를 지으며 막연히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영화의 역사 한줄조차 모를 때, 이 길을 처음 열어준 사람이 한 학년 선배이기도 한 김진형 촬영감독이었다. 그리고 당시 교수님이었던 홍상수 감독님. 이미지를 가지고 노는 제멋대로의 시나리오를 혼날 각오로 들고 갔는데 감독님이 그러셨다. “이건 가짜 같지가 않다. 계속 해봐라.” 그 말씀에 용기를 얻었다.
- 자신을 집요하게 들여다본 이야기로 첫 장편을 만들었다. 이젠 바깥으로 시선을 돌릴까.
<아코디언 도어>는 내 안에 있는 걸 모두 토해낸 영화다. 그래서 후회도 없고 차기작이랄 것도 없이 제로 상태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게 된 지 3년이 채 안됐는데 영화의 무엇이 좋은지 설명하긴 어렵다.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촬영하고 싶고, 찍다 보면 편집하고 싶은데 할 땐 다 지옥이다. (웃음) 그렇지만 그 안에서 동료들과의 추억이 쌓인다. 긴 고통 속에서 짤막짤막한 행복을 느끼며 좋아하는 영화를 계속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