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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마침내 제 위치를 되찾은 한 여성의 삶, 그리고 이름에 관하여, <양양>
조현나 2025-10-22

10년 전 어느 날, 술에 취한 아버지가 양주연 감독에게 돌연 “너는 고모처럼 되면 안된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술김에 던진 말을 기억하지 못했으나 당시의 통화를 기점으로 양주연 감독은 40년 전 사망한 고모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조카인 자신이 결혼해 가정을 꾸릴 때까지 가족들이 고모의 존재를 숨겨온 이유에 관해 감독은 의문을 품고 조사한다. 아버지와 더불어 고모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들을 만나 생전 고모에 관한 기억을 모으고 고모가 탐독한 책, 고모의 사진과 같은 흔적을 수집한다. 음독을 했다는 주변 지인들의 증언이 이어졌지만 정작 가족들의 수사 요청이 없었기에 고모의 죽음은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고모에게 집착하던 애인이 있었고, 아버지의 기억과 달리 자신의 집이 아닌 애인의 집에서 고모가 사망한 채 발견됐다는 사실, 더불어 그가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양양>은 양주연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제목은 양씨 성을 가진 여성(梁孃)을 의미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을 조명한 단편 <내일의 노래>,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여성들의 기억을 파고든 <옥상자국>과 <40>, <양양>의 전신인 단편 <그녀의 이름은>등 양주연 감독은 꾸준히 소외된 여성들의 서사에 주목해왔다. 개인사에서 출발해 역사적 맥락으로 논의를 확장하거나 사회 인식의 측면으로 나아간다는 연출적 특성은 장편 <양양>에도 드러나 있다. 조사를 거듭하며 양주연 감독은 자신의 고모 또한 시대의 피해자임을 알게 된다. 1970~80년대 공공연하게 이뤄져온 성차별의 희생자로서 그는 주체성을 지닌 여성임에도 집에선 부모가 원하는 착한 딸로서만 행동해왔다. 그런 고모의 과거에서 양주연 감독은 대외적으로 여성 인권운동에 앞장섰음에도 집에선 남동생과의 차별 대우에 쉽게 대항하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한다. 주저함 없이 자신과 가족의 일면을 드러내고 정면 돌파하는 양주연 감독의 의지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가족들의 태도 또한 인상적이다. 자살한 누나에 관해 말하길 어려워하면서도, 아버지는 고모의 존재를 복원하려는 딸의 시도에 기꺼이 동참한다. 그리고 영화 말미엔 양주연 감독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양양>의 미덕은 이러한 논의를 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끝내지 않고 외부로, 사회에서 자주 지워졌던 여성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는 데에 있다.

결국 양주연 감독의 제안으로 가족의 묘비엔 고모의 이름이 새로 새겨진다. 사라질 뻔했던 고모의 존재가 마침내 제 위치를 찾는 모습은 <양양>에서 가장 강렬하게 와닿는 장면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양양>의 크레딧을 반드시 확인해볼 것을 권한다. 출연자 명단에 첫 번째로 오른 이는 ‘양지영’이다. 가족이, 사회가 바라는 틀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외면됐던 한 여성의 이름이 그의 조카 양주연에 의해 뚜렷이 명명되는 순간이다. 제11회 부산여성영화제 대상 수상작.

close-up

“나한테 고모가 있었다고?” 영화 초반,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오는 양주연 감독의 짧은 질문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긴 세월 동안 그의 고모 양지영이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조사를 거듭할수록 더해지는 물음에 관해 영화 <양양>은 차분히 답을 찾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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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들> 감독 지혜원, 2024

<목소리들>은 제주 4·3사건의 피해자들, 제대로 알려진 적 없었던 여성 생존자들의 과거를 수면 위로 건지는 다큐멘터리다. 시대적 배경 및 작품의 주제는 다르지만 외면받아온 여성들의 존재에 주목하며 이들의 과거와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점에서 함께 논해볼 여지가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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