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긴 삶을 축약한다면 달리기에 가깝지 않을까. 내 몸을 스스로 운영해 움직여야만 하고, 주변에 동료가 보이더라도 다른 이들이 나의 일을 대신해줄 수 없다. 기분 좋은 고독감과 자의적인 외로움. 곡선처럼 반복하는 승리감과 열패감. 때론 삶은 마라톤처럼 지루하지만 100m 달리기만큼 초조하다. 우오토 작가의 원작 만화를 영화화한 <100 미터.>는 스포츠물이지만 철학영화에 가깝다. 어렵거나 난해해서가 아니라 자꾸만 질문을 건네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어떤 정론, 통찰, 계몽, 진리를 내세우든 난 나를 인정해. 그거야말로 내 사명이자 살아가는 의미이고 달리는 이유다.” 그렇다면 당신이 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답을 찾아 헤매는 모든 이들을 대신해 이와이사와 겐지 감독과 쓰쓰미 히로아키 음악감독의 말을 전한다.
- 우오토 작가의 원작 만화 <100미터.>를 영화화했다. 처음 작품을 맡았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무엇인가.
이와이사와 겐지 <100 미터.>의 테마는 스포츠지만 일종의 대화극이기도 하다. 캐릭터끼리 대치하는 장면을 그저 담담하게 보여주기보다 연출적으로 ‘볼거리’를 만들어야만 했다. 특히 100m 경기 장면. 영상적으로 고조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공들였다.
쓰쓰미 히로아키 원작을 처음 완독한 날 충격받은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100미터.>안에 그려진 열정은 음악을 향한 나의 경험과 비슷하다. 토가시와 코미야의 라이벌 관계나 이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이번 작업에 중요한 기준이 됐다. 무엇보다 ‘달린다’라는 인간의 근원적 행위에서 컴퓨터로 만든 전자음이 아닌, 인간의 육체가 힘 있게 전달하는 라이브 밴드 사운드를 결합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남은 것은 “100m를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면 다 해결돼”라는 토가시의 대사다. 이 말을 내게 접목해보면 이렇다. “기타만 잘 치면 모든 게 다 해결돼.”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게 하고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 육상은 자칫하면 같은 구도가 반복하는 단조로운 구조를 띨 수 있다. 이에 따라 달리기는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실사영화에서도 매우 까다로운 소재다. 그런데 <100 미터.>는 달리는 사람의 시선, 관중의 시선, 선수를 정면으로 응시한 시선 등 다양한 앵글을 비추면서 다양성을 보완했다. 앵글이 많을수록 산만해질 수 있지만 육상의 역동성과 잘 맞아떨어진다.
이와이사와 겐지 확실히 육상은 직선형 스포츠이기 때문에 그려지는 방식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영화의 절반이 달리기이고. 여러 방식을 고안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그 덕에 지루함을 덜 수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실사 영상이나 3D 영상을 편집해 장면을 이어 붙이고, 그때그때 컷을 추가하거나 교체하면서 시행착오를 거쳤다. 앵글의 균형을 잡는 데 로토스코프 기법의 장점이 결국 빛을 발했다.
- 주인공이 고등학생이 된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로토스코프 기법이 전면에 드러난다. 사실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프레임을 하나하나 수작업하는 것을 장인의 미덕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존재해왔기에 AI 접목이 언제든 가능한 로토스코프는 이 정신과 반대된다는 인식이 있다. 반면 스포츠물로서 로토스코프가 가지는 효율성이나 예산 측면에서 유용한 면도 있을 것이다. 연출자로서 이를 어떻게 바라보나.
이와이사와 겐지 애니메이션 업계는 확실히 로토스코프처럼 실사나 AI에 의존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상상해 만드는 것을 훌륭한 작업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다기보다는 조금 더 확장된 시야에서, ‘영상 표현’으로서 애니메이션을 선택했다. 주제에 따라 실사가 더 적합하다면 그것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로토스코핑은 애니메이션을 그리는 기술이 부족한 사람들도 애니메이션을 작업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나온 기술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애니메이션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이 기술로 내가 드러내고 싶은 표현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기에 선택했을 뿐이다. 다만 산업 내에서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라는 의식과 나의 생각이 조금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 보통 스포츠물에서는 음악을 통해 뭉클함이나 벅차오름을 주요하게 드러내는 데 반해 <100 미터.>는 주로 긴장감을 전달한다. 이 지점을 음악으로 소화하기 위해 음율, 악기, 비트 등 어떤 요소를 고려했나.
쓰쓰미 히로아키 정확하다. <100 미터.>는 고양감보다 긴장감이 중요한 작품이다. 영화 초반, 메인 테마의 전주에서 심장 박동 소리를 사용해 스타트에 선 긴장감을 표현한 이유기도 하다. 다만 인간 드라마가 그려지는 장면에서는 일부러 음악을 넣지 않으려 의식했다. 음악으로 감정을 지나치게 설명해버리면 오히려 저차원적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있다. 덜어냄으로써 음악이 없는 조용한 장면의 심리적 긴장감이 더 돋보일 거라 믿었다.
- 토가시와 코미야가 처음으로 정식 경기를 치르는 장면을 이야기해보자. 비 내리는 경기장 모습은 실제 사람이 중계하듯 카메라가 조금씩 흔들리게 연출했다. 또 롱테이크로 진행되는 이 장면에서 스타트 직전까지 노래가 이어지며 초조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이와이사와 겐지 <100 미터.>를 작업하면서 처음으로 실제 육상경기를 보았다. 그때 선수들이 입장하고 스타팅블록을 세팅한 뒤에 선수를 소개한 후 경기가 시작되는 일련의 흐름이 하나의 이미지로 보였다. 원작에서도 비 내리는 날의 결승전이 하이라이트이기 때문에 영화에서도 이 부분을 꼭 그려내고 싶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선수들을 따라가는 롱테이크는 전개상 꼭 필요한 장면은 아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여유롭게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영화적 표현이라 생각한다. 경기 전의 긴장감, 경기에 임하는 고양감, 묵직한 책임감, 몰입감까지. 컷을 일부러 나누지 않았다. 경기 자체는 순식간에 끝난다. 하지만 그렇게 빠르게 끝나버리는 중요한 순간이 시작되기까지 어떤 감정이 뒤따르는지 충분히 보여주고 싶었다.
쓰쓰미 히로아키 처음 만든 데모 버전은 완성본보다 음이 많고 역동적이었다. 그때 감독님이 피드백을 주셨다. 조금 더 날카롭고 차분한 요소가 필요하다고. 음악은 조용하더라도 선수들 내면의 투쟁심을 끌어올려줄 수 있는 음악이었으면 좋겠다는 구체적인 요청도 함께 있었다. 이 장면에서는 빗소리가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일부러 곡의 마지막 부분을 컷아웃으로 갑자기 끊어버려 빗소리를 부각했다. 다만 소리의 끊김이 자연스러울 수 있도록 어쿠스틱기타를 더했다.
- 고등학생 시절 니가미와 토가시는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딛고 다시 달리기로 마음먹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냥 딱 한번. 달려보기만 했을 뿐인데 작은 파동만으로 원래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와이사와 겐지 스포츠 선수들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각자의 터닝 포인트가 있다. 계기가 되는 어떤 찰나랄까. 다른 사람이 보기에 전혀 계기처럼 보이지 않아도 자신만큼은 알고 있는 중요한 순간이다. 토가시와 니가미는 그 계기가 각각 다르다. 토가시는 자신의 달리기 재능에 의문을 품고 더이상 성장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던 중 힘을 빼고 달려본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그 순간, 오히려 이전과 다른 느낌을 받는다. ‘어? 지금까지의 달리기와는 다른데?’ 하면서. 토가시가 지녀온 삶의 태도가 전환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반면 니가미는 은둔하는 자신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그때 손을 뻗어준 게 토가시다. 외부로부터 자신을 이끌어주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경기장을 떠나 홀로 지낸 니가미의 선택도 그의 삶의 한 궤적이지만 다시 박차고 일어서고 싶을 때, 외부에서 그 분발을 도와주는 이가 있다는 것 또한 인간의 삶의 한 부분이다.
- 오피셜히게단디즘(Official髭男dism)의 <らし さ>(나다움)가 이번 작품의 테마송이다. 음악감독으로서 가장 만족하는 요소를 꼽는다면.
쓰쓰미 히로아키 정말 자주 듣는 노래다. <らしさ>를 정말 좋아한다. 이 영화는 인생의 다양한 사건들이 결집되다가 마지막 레이스, 그 10초에 모든 게 집약된다. <らしさ>또한 그렇다. 마지막 부분에 “살아 있어 다행이다”라는, 단순하지만 보편적 생애를 관통하는 중요한 한마디로 응축된다. 이러한 노래 구성이 영화 본편과 강하게 연결돼 있어 강한 감동을 준다. 오피셜히게단디즘만의 마음 따뜻해지는 가사가 특히 좋다.
- 오묘한 엔딩 장면은 영화의 여운을 깊게 만든다. 제 소명을 새로 다짐한 토카시와 코미야의 미소는 명확하지만 열린 결말로 이어지는데.
이와이사와 겐지 답을 명확하게 그리고 싶지 않았다. 작은 여지를 남기는 것. 관객이 상상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영화의 묘미다. 이 또한 <100 미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해석을 가지고 살아가면 좋겠다. 토가시와 코미야, 정말 누가 이겼을까. 그 결말에 대해 모두가 자기만의 답을 내릴 수 있길 바란다.
- 영화는 계속해 지금 내가 머무르는 자리의 존재론을 묻는다. “무엇을 위해 달리냐”는 작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대사다. 감독님에게 묻고 싶다. 감독님은 무엇을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나.
이와이사와 겐지 많은 관객이 영화를 보며 자신의 삶을 반추할 것 같다. 사람들은 자주 고민한다. 자신의 직장이나 학교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무엇이 자신에게 도움 되는지.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을 계속해 던지지만 결국 단순하게 “하고 싶으니까”라는 이유로 귀결된다. <100 미터.>또한 그렇다. 스포츠이기 때문에 승패가 있고 숫자가 있고 기록이 있지만 결국엔 하고 싶으니까 한다. 딱 이 한마디. 이 자체가 의미이고 존재 목적이다. 나는 이번 작품을 가급적 어린 세대가 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두 시간짜리 영화가 그들의 삶에 작은 피드백이 될 수 있길 바란다. 오늘은 이 마음을 느꼈으니 적어도 내일부터는 열심히 살아보자, 한번만 해보자는 마음을 먹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