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10년 만이다. 박찬욱 감독과 김태리 배우는 연출자와 배우로 만나 2015년 <아가씨>크랭크인에 들어갔고, 영화가 완성된 뒤에는 칸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등에 동행하며 전세계 관객을 만났다. 이후 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박찬욱 감독은 안개 같은 사랑을 그린 <헤어질 결심>을 거쳐, 해고로 인한 수난과 범죄가 뒤섞인 블랙코미디 <어쩔수가없다>를 안고 베니스국제영화제와 토론토국제영화제를 다녀왔다. 김태리 배우는 “먼 항구에 가서 반짝이는 것을 입고 이름 모르는 것을 먹고”라고 다짐했던 숙희(김태리)처럼 영화 속에서 민주화운동 시기로, 시골로, 또 우주로 나아갔다. 바빠서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듯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가 있다면, 두 영화인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김태리 배우는 <어쩔수가없다>를 보고 든 생각과 의문을 잔뜩 메모해와 숙희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박찬욱 감독을 바라보며 또랑또랑하게 질문했고, 순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 감독은 허허 웃다가도 예리한 물음에 어디서도 이야기하지 않은 디테일과 구상을 자세히 풀어놓았다. 그 현장을 지면에 세밀히 옮긴다. 말과 말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두 영화인 사이의 신뢰까지도 자연스레 전해질 것이다.
박찬욱 안녕하세요, 박찬욱입니다.
김태리 안녕하세요, <아가씨>에서 숙희 역할을 했던 김태리입니다. 감독님 촬영 현장에 놀러 갔다가 제목이 <어쩔수가없다>라는 걸 처음 듣고 “제목이 이거예요?”라고 여쭤봤던 기억이 나요. 그전까진 <도끼>라는 원제로만 알고 있었어요.
박찬욱 그때 내가 확정이라고 말했나?
김태리 그건 아니었어요.
박찬욱 대부분 <어쩔수가없다><도끼>둘 다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그래서 <어쩔수 가없다>로 정했다고 말했을 때 다들 정했다니 어쩔 수가 없는데, 좋다는 말은 안 나오는 표정이었죠.
김태리 저는 제목이 되게 좋았어요.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실생활에서 이 말을 얼마나 많이 내뱉는지 계속 인지됐거든요. 그럴 때마다 ‘어, 나 지금 합리화 중인가!’ (웃음) 싶었죠. 그런 생각 하나가 제 머릿속에 끼어든 게 재밌었어요.
박찬욱 맞아요, 맞아요. 그게 의도예요.
김태리 <아가씨>촬영 때 인상이 강렬했던 게, 감독님, 리허설을 엄청 엄숙하게 하는 거 아세요? 예를 들어 오늘 아침 7시까지 현장으로 모이라는 전체 연락이 돌면, 7시에 온 스태프와 배우들이 모여 실제 촬영처럼 스토리보드에 있는 그대로를 리허설해보는 거예요. 본촬영 전에 연습하는 기분이니까 저는 너무 좋아서 신나게 참여했는데 분위기가 되게 조용하고 엄숙하고 스태프들이 잔뜩 긴장한 듯한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거든요. 그때 저는 아무것도 모를 때라 너무 좋았지만요. 다른 촬영 현장 가봤더니 리허설이 그렇게 엄숙하지는 않더라고요, 리허설이! (웃음)
박찬욱 스태프들이 리허설을 통해 동선이나 클로즈업 등의 얘기를 듣고 준비하죠.
김태리 <어쩔수가없다>에 그런 식으로 공들여서 리허설을 많이 했던 장면이 있어요?
박찬욱 그거죠. ‘고추잠자리 신.’ 만수(이병헌), 범모(이성민), 아라(염혜란) 3명이 얽혀서 좁은 방에서 리허설했고, 스토리보드를 여러 차례 수정하면서 만들었죠.
김태리 그 장면은 음악 없이 찍었을 거 아니에요.
박찬욱 없었죠. (웃음) 음악은 없는데 소리는 질러야 하니까 배우들이 힘들었죠. 그러다가 중간에 없던 아이디어도 나왔어요. 권총이 캐비닛 아래로 들어가버리면 어떨까? 캐릭터들이 총을 찾아 더듬더듬하는 아이디어를 이병헌씨가 냈어요. 이병헌씨가 어디 가서 반드시 자기 아이디어라고 얘기하라고 그랬어요. 그런 얘기를 우리끼리 재미있게 말하다가 ‘Why not?’이란 마음으로 바꾸자 했죠. 누가 건드려서 총이 발사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도 나와서 그렇게 갔죠. 계획을 많이 세웠지만 즉흥적으로 한 것도 있어요.
김태리 총소리가 났지만 아무도 총알에 안 맞아서 놀랐어요. 당연히 맞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안 맞았기에 반전이었어요. 대담에 앞서 감독님의 해외와 국내 인터뷰를 많이 봤어요. 근데 의상 얘기가 없어요. 감독님이 만수 집이라든가 범모 집이라든가 반장 선출(박희순)의 집이라든가, 집을 공들여 찍으셨다고 인터뷰에서 말씀하셨는데 집에 사람이 너무 잘 묻게끔 의상을 디자인했던 걸까 생각되더라고요. 의상과 관련해서 얘기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못한 게 있으신가요?
박찬욱 고추잠자리 신에서 입은 아라의 붉은 브이넥 스웨터는 몸싸움할 때 만수가 잡아당기면 어깨가 다 드러나잖아요. 그렇게 되라고 브이넥 스웨터를 골랐죠. 그래서 범모는 자기가 지금 총 맞은 상황보다 그게 더 못 견디겠는 거죠. 그때 가장 크게 비명 지르죠. 아라 옷을 장면에 맞춰서 설정했고, 미리(손예진)도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요. 색깔만 파랑이에요.
김태리 제가 아라와 범모의 젊은 시절 장면을 찍을 때 혜란 언니를 응원하러 현장에 갔는데, 제가 언니를 보고 놀라서 ‘무슨 신 찍는 거예요?’ 그랬더니 언니가 엄청나게 쑥스러워했어요.
박찬욱 그때도 염혜란, 이성민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멋있게 만들어 달라고 그랬죠. 심혈을 기울였죠. 혜란 언니하고의 인연도 좀 얘기해줘요.
김태리 학교 선배님이 혜란 언니랑 친구였어요. 학교 선배님이 소속된 대학로 극단에서 오퍼레이터가 필요한데 돈은 많이 못 주지만 함께하겠냐고 제안하셨어요. 돈이 무슨 상관이에요? 대학로를 갈 수 있는데! (웃음) 그 극단에서 혜란 언니를 처음 만났어요. 그렇게 작업하면서 그 극단이 좋아진 거예요. 선배님들도 너무 좋고 연출님도 좋고.
박찬욱 그럼 연기자가 아니었다고 그때는?
김태리 네, 첫 만남은요.
박찬욱 아 진짜? 그건 몰랐네.
김태리 극단이 신입 단원을 안 뽑은 지가 굉장히 오래됐었어요. 저 때만 해도 대대적으로 신입 단원을 뽑는다거나 하는 그런 시기는 지나갔던 것 같아요. 어떻게 이 극단에 들어갈지 고민했는데, 오퍼레이터는 계속 필요하잖아요. 조연출도 필요할 거고요. 그래서 저를 노동력으로 쓰시라고 하고 눈치껏 붙어 있었던 거죠. 그랬더니 어느 날 다른 사람들에게 단원이라고 소개를 해주시더라고요.
박찬욱 오, 극단 대표님이?
김태리 네! 그렇게 단원이 됐죠. 이후 언니가 유명해지고, 시상식 같은 곳에서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어요. 언니는 제 시작에 같이 있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런 특별한 관계입니다. 언니가 감독님을 표현하기를 “감각과 사고를 예민하게 깨워주는 좋은 창작자”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어쩔수가없다>를 보고 언니에게 물어봤어요. “언니, 권총을 아이패드에서 찾는 장면에서 언니가 ‘요거’라고 하잖아요. 그거 대본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요?” 하니까 언니가 “너 되게 예리하다”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원래 ‘이거’로 쓰여 있었다고 언니는 기억하던데, ‘이거’를 ‘요거’로만 바꾼 건데 사람이 달라 보이잖아요. 아라를 아라처럼 보이게끔 하면서도, 아라가 묘하게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고요.
박찬욱 맞아요, 그게 포인트예요.
김태리 그 대사에 분명히 미세한 조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어쩔수가없다>도 말맛이 참 좋았고 배우들도 연기하면서 너무 좋았을 것 같아요.
박찬욱 범모와 산길을 걸을 때 아라가 “당신도 나처럼 해봐. 햇빛을 바람에 쌈 싸먹어. 단풍에 푹 찍어서”라고 하죠. 입을 벌린 채 대사를 하니까 알아듣기가 어렵죠. 근데 이런 대사를 쓰면서도 배우가 이상한 대사라고, 이런 걸 어떻게 하냐고 못하겠다고 그러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김태리 배우는 너무 좋아하죠!
박찬욱 배우가 재밌어 해줘서 고마웠어요.
김태리 영화 보면서 제일 놀라웠던 게 피크닉 장면이에요. 돗자리 깐 곳이 바위 옆이잖아요. 범모랑 아라가 앉아 있고 뒤에서 만수가 훔쳐보는 구도가 <아가씨>속 장면 같은 거예요. 어머, 오마주네! 기분 좋았어요. 히데코(김민희)와 백작(하정우)이 피크닉 가면, 그 모습을 숙희가 훔쳐보잖아요. 그때도 바위 위로 피크닉을 가고요.
박찬욱 맞아요. 나도 비슷하게 보이겠다고 생각했어요.
김태리 다들 알아볼 거로 생각했는데 아무도 얘기를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고 싶었어요. (웃음) 혹시 다른 오마주도 있어요?
박찬욱 만수의 치통은 유현목 감독님의 <오발탄>. 영화 <오발탄>에서 철호(김진규)가 계속 치통에 시달려요.
세번의 범죄, 세명의 분신
김태리 이성민 선배님이 인터뷰에서 “범모는 만수처럼 복잡한 캐릭터는 아니잖아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제 눈에 범모는 만수와 동일 인물 같았어요. 물론 대사나 행동의 유사성을 바느질하듯 이어간 것도 있지만 정말 유사해 보였거든요. 배우들에게 서로 이어져 보이도록 유사성을 찾아보라고 주문했는지, 아니면 배우 각자가 연기한 걸 그대로 썼을 뿐인데 유사성이 드러난 건지 궁금해요.
박찬욱 각본에 이미 써놓은 것이 있고 스토리보드를 통해서 한 것도 있어요. 배우들한테는 리딩 때 두 사람 사이의 연결점이 있어서 대사도 이렇게 쓴 거라고 설명을 다 해줬어요. 그렇기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도록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져오라는 요구는 안 했어요.
김태리 한 리뷰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내용을 봤어요. 만수가 죽이는 세명이 다 만수래요. 범모는 만수 그 자체고, 선출은 만수가 원한 미래의 모습, 시조(차승원)는 살인 행각을 벌이지 않았던 만수의 과거. 만수가 자신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죽여서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해석이었어요. 전 이 해석이 재밌고 맞는 말 같더라고요.
박찬욱 그럴듯하네요. 만수가 찾아가는 세명이 정말 다 그의 분신이죠.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고요. 그래서 그들에게 가하는 폭력이 사실 자기파괴적인 행동이죠. 애초에 그렇게 설계됐어요.
김태리 제가 영화를 두번 봤는데 처음 볼 때 정말 빵 터져서 웃었던 장면은 부부 싸움 신이에요. 만수가 “넌 예쁘잖아!” 하니까 미리가 “너도 잘생겼잖아!”라고 해요. 그 톤이 너무 웃겨요.
박찬욱 나도 좋아하는 대사예요. 그런데 “너도 잘생겼잖아”라는 대사는 제일 나중에 쓰였어요. “어떻게 나를 의심해?”라고 미리가 말하면 만수가 “그럴 수 있지. 넌 예쁘니까. 넌 너무 예쁘잖아”까지는 내가 썼는데, 초고를 같이 쓴 이경미 감독이 우리 사무실에서 자기 시나리오를 쓰다가 잠깐 등판해서 “제가 한줄만 더해도 될까요?”라더니 썼어요. “너도 잘생겼잖아”라고. (웃음) 너무 이경미스럽지 않아요? 그 대사를 받는 이병헌의 얼굴이 나는 정말 웃겨요. “너도 잘생겼잖아”에 대해 ‘그건 그렇지’ 하는 그 표정! 그래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거야. 할 말이 없어요. 이어지는 말도 내가 좋아하고, 이 영화의 주제 중 하나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대사예요. 만수는 할 말도 없고 말싸움에 졌는데 어떻게 해보겠답시고 무게 잡고 있다가 고개를 들면서 “나 지금 전쟁 중이잖아. 가족을 위해서”라고 해요. “신의, 신뢰” 이런 같잖은 소리를 하죠. 앉아서 서 있는 미리는 올려다보면서요. 남자라고 이겨보려는 모습이 너무 웃겼어요. 그 연기를 <공동경비구역 JSA>시절의 젊은 이병헌이었다면 제아무리 연기 잘하는 배우였어도 그렇게는 못했을 것 같아요.
김태리 그 장면에서 편집과 병헌 선배 연기의 의외성이 빛났어요. 만수가 말하려고 일어났는데 불이 탁 켜지니까 짧은 순간에 살짝 말을 절잖아요.
박찬욱 그렇지. 병헌 배우가 그런 걸 잘해요. 믹싱할 때 그 장면에서 이병헌 배우의 대사 볼륨을 조금 낮췄어요. 미리가 불을 탁 켜자 만수가 말을 절고, “나 지금 전쟁 중이잖아” 할 때부터 볼륨을 살짝 줄였어요. 기어들어가듯 자신 없어하는 상황을 더 살렸죠. 이병헌씨가 이런 걸 알아야 하는데…. 내가 이런 건 다 얘기 안 해주죠.
김태리 배우가 실제로 연기로 보여주지 않았을 때는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 아니에요?
박찬욱 사실 병헌씨가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게 본인이 그렇게 연기를 했고 그걸 도와주는 거죠. 병헌 배우가 그렇게 안 했으면 나도 생각을 못했겠죠.
김태리 이경미 감독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영화 끝나고 각본을 누가 썼는지 나오는데 4명이더라고요. 각색 과정이 얼마나 첨예했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박찬욱 처음 내가 무슨 배짱이었는지 몰라도 원작 판권을 확보도 하기도 전에 각색을 시작했더라고요. 이경미 감독의 메모에 적혀 있어요. 2010년 판권을 확보했고, 미국영화지만 일단 우리는 한국인이니까 하워드, 알리시아 이렇게 이름을 만들어서 미국 배경으로 시나리오를 썼고, 그때의 대부분이 지금 영화에 들어가 있었어요. 그다음 원어민 작가가 필요해서 돈 매켈러라는 감독 겸 배우 겸 작가 겸 캐나다에서는 삼척동자도 아는 유명한 배우와 일했죠. 샌드라 오가 첫 주연한 영화가 <라스트 나잇>이라고 돈 매켈러가 감독 데뷔한 작품이에요. 돈 매켈러가 샌드라 오와 완전 ‘베프’예요.
김태리 진짜요? 신기해!
박찬욱 돈 매켈러하고 영어 대사를 잘 만드는 작업을 했는데 일을 하다 보니 죽이 잘 맞아서 대사 윤색 이상의 작업까지 하게 됐어요. 무도회 장면을 그 친구가 많이 기여했죠. 원래는 그 무도회가 미국의 역사를 주제로 한 무도회였어요. 링컨처럼, 조지 워싱턴처럼 꾸민 사람도 있는데, 미리는 포카혼타스처럼 입는다고 구상했죠. 이후 미국영화를 포기하고 한국영화로 만들기로 하면서 이자혜 작가도 각색에 참여했어요. 김태리 배우도 이자혜 작가를 알잖아요. <아가씨>때 연출부 막내. 이자혜씨가 우리 기획실에서 계속 근무했는데, 범모가 약속이 취소돼서 일찍 귀가할 때 아내 아라가 젊은 남자와 함께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는 걸 만수가 알고 어떻게든지 범모가 집에 오는 걸 막으려는 시퀀스가 이자혜 작가와 함께 일하며 만들어졌어요. 이자혜 작가가 이성민 배우의 팬이어서 성민씨를 위해서 뭔가를 더 만들어야겠다고 자꾸 주장해서 그렇게 됐어요.
김태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색에 참여하면 너 한번 나 한번 시나리오를 주고받으면서 메일을 쓰는 건가요? 어떻게 작업하는 거예요?
박찬욱 돈 매켈러와는 그렇게 하기는 어려운데 정서경, 이경미, 이자혜 같은 한국인 작가들과는 다 같이 써요. 컴퓨터 하드는 공유하고 모니터하고 키보드를 각자 한벌씩 가지고 써요. “너도 잘생겼잖아”라는 대사를 누가 치면 상대방이 느낌표를 하나 더 붙인다든가, 재미없는 대사는 지워버린다거나 해요.
김태리 지워버린다고요? 감독님만 지우는 거죠?
박찬욱 아니에요. 다들 지워요.
김태리 감독님 대사 중에 삭제된 게 있어요?
박찬욱 그럼요. 많죠. 작가들이 “감독님 이게 진짜 너무 오글거려요”라면서 딱 지워버려요. 그런 일을 많이 당하죠. 그렇게 쓰면 재밌어요. 혼자 있으면 자꾸 눕고 싶고 자꾸 인터넷 보고…. 공동 작업이 다 끝나고 제일 마지막에 일주일 정도만 혼자 작업하고 나머지는 혼자 일하기 싫어해요.
김태리 <아가씨>는 결말을 원작 <핑거스미스>와 완전히 다르게 갔잖아요. 이번에도 결말 부분이라든가, 혹시 구조적으로 위치가 바뀐 부분이 있나요?
박찬욱 원작은 1인칭으로 만수 머릿속 생각을 따라갈 수 있어요. 프랑스에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에 의해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거기서도 주인공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있었어요. 하지만 <어쩔수가없다>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관객이 만수에게 동일시되지 않게 하고 싶었거든요.
김태리 보이스오버는 없지만 오버랩이 되게 많았던 것 같아요. 화면전환으로 이 사람의 심리가 계속 스쳐 지나가는 걸 보여주면서요.
박찬욱 맞아요, 긴 디졸브를 많이 썼죠. 옛날 영화는 굉장히 길게 디졸브를 썼어요. 아주 효과적으로 숏들이 잘 붙기만 한다면 긴 디졸브도 참 멋있어요. 그리고 아들과 아내가 범죄를 눈치챘다는 것도 원작엔 없어요. 그러니까 결말의 느낌이 통째로 달라지죠. 결말의 AI 얘기도 당연히 90년대에 쓰인 원작 소설에는 없었어요.
김태리 원작은 어떻게 끝났어요?
박찬욱 경찰이 방문하고 주인공은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해요. 그리고 재취업에 성공해 첫 출근해요. 주인공 입장에서 봤을 땐 해피 엔딩이에요.
김태리 원작은 영화보다 조금 더 앞부분에서 끝나네요.
박찬욱 주인공이 잡힐 줄 알았는데 완전범죄로 끝나니까 독자는 오히려 뒤통수 맞는 기분이죠.
김태리 저는 <어쩔수가없다>보면서도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박찬욱 원작은 더하죠. 가족도 모르고 형사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