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하이퍼나이프>는 신경학계 사제지간인 덕희(설경구)와 세옥(박은빈)의 치열한 경쟁과 기묘한 연민, 그리고 뒤틀린 우정의 서사를 따라가는 8부작 메디컬 드라마다. 음지의 불법 수술실, 허름한 지방 약국, 살인 피해자의 시체를 파묻는 야산 등 스산한 공간에서 진행되던 <하이퍼나이프>의 초기 물줄기는 3화에 이르러 ‘부산’이라는 지역명을 또렷하게 밝힌 대도시로 흘러든다.
수술과 생업, 그리고 살인까지 병행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덕희와 세옥을 부산으로 불러온 것은 의학계 최고 권위의 상인 ‘이치다 어워드’다. 덕희의 10년 연속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저지하기 위해 세옥이 이치다 제약의 대표를 만나 담판 협상을 벌이는 계기가 되는 이 시상식은, 작품 속에서 부산의 상징적인 랜드마크들을 다채롭게 비춘다. 광안대교, 마린시티, 영화의전당 등 부산의 신도시적 면모를 대표하는 공간들은 두 사람의 치열한 심리전과 맞물려 극에 긴장감을 더한다. 부산이 선사하는 혼재성과 대비의 미학을 강조한 오종환, 김한빛 프로듀서로부터 <하이퍼나이프>부산 촬영의 뒷이야기를 들었다.
‘이치다 어워드’ 부산에서 개최되다
“부산은 부산국제영화제 등 다양한 국제행사를 개최해온 도시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일본과도 가까워 극 중 어워드 개최지로 최적이었다”라고 오종환 프로듀서는 설명했다.
시상식 장면은 서울의 코엑스 등 여러 로케이션을 물색할 수도 있었지만, 배경이 부산으로 특정된 덕분에 영화의전당이라는 실내 행사장을 신속하게 선정할 수 있었다. 빠듯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영화의전당 측의 협조 덕분에 섭외에서 촬영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국제행사 유치 경험이 풍부한 부산의 이미지와 기관의 유연한 촬영 지원 시스템이 빛을 발하며 탄생한 장면이었다.
<하이퍼나이프>의 세 번째 에피소드가 부산을 배경으로 할 것이라는 점은 김선희 작가의 시나리오 단계부터 명시된 부분이었다. 극 중 ‘이치다 어워드’는 일본계 글로벌 제약회사에서 주최하는 공신력 있는 시상식으로, 세계 최고의 기술로 학계의 발전을 이끈 의사들을 선정하는 자리다. 이처럼 권위 있고 성대한 시상식에는 기존 회차들의 배경이 되는 좁은 수술77실을 벗어나 웅장하고 멋진 그림이 어울리겠다는 작가와 감독의 의견 일치가 있었다.
영화인들이 사랑하는 ‘부산룩’의 재해석
영화인들이 사랑하는 ‘부산룩’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김선희 작가가 <하이퍼나이프>를 집필하며 구상한 부산룩의 정체는 ‘발전된’, ‘국제적인’, ‘상류적인’, ‘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한 항구도시’의 이미지였을 것이다. 드라마 <아테나: 전쟁의 여신>(2010), <탈출>(2024) 등 다수의 프로젝트에서 부산 촬영을 진행한 바 있는 오종환 프로듀서는 ‘부산룩’의 핵심 정체성을 ‘혼재성’으로 꼽았다. “제작자들이 부산 촬영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이미지는 부둣가와 항구일 것이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조금만 더 들어오면 시장과 정겨운 타운들이 펼쳐진다.” 수도권에서 제작하는 작품이라면 가까운 인천을 고려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부산에는 그보다 더 ‘짙은’ 느낌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오래된 주택가와 5성급 호텔들이 근거리에 공존하는 부산의 독특한 풍경은 <하이퍼나이프>속 두 주인공, 덕희와 세옥의 닮은 듯 다른 대비적 관계를 공간 구성으로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되었다.
덕희와 세옥, 대비되는 욕망의 공간
세계 최고의 외과의사인 덕희는 이치다 어워드 후보 자격으로 부산을 찾는다. 학계의 누구도 그의 10년 연속 수상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 그의 뇌수술 실력은 세계 정상급이다. 그는 부산의 고급 호텔인 그랜드조선 호텔과 윈덤그랜드 부산 호텔에 머물지만 뇌를 잠식해가는 종양과 그의 명예를 위협하는 세옥의 존재 때문에 화려하고 넓은 방 안에서도 불안과 외로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그가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어워드 장소로 설정된 영화의전당 등 호텔 밖으로 나서는 순간마다 기자들이 몰려들어 질문 세례를 퍼붓는 것처럼 끊임없는 스포트라이트를 견뎌야 한다.
한편 부산 마린시티의 더베이101은 이치다 어워드의 전야제가 열리는 장소다. 오종환 프로듀서는 “허허벌판에 가까운 공간을 파티 장소로 탈바꿈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며, 범죄스릴러 장르의 무거운 분위기에서 이곳이 “관객의 시야를 한번 틔워주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제작진은 넓고 탁 트인 파티 공간을 원했고, 배경에 정박된 요트까지 협조받은 더베이101이 선택되었다. 더베이101은 워낙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인 만큼, 촬영 기간 동안 시민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진행되었다.
미포, 추가적인 부산 촬영
세옥의 계략으로 이치다 어워드 10년 연속 수상 기록을 세우는 데 실패한 덕희는 부산 미포에 위치한 횟집에 마련된 회식 자리에 참석한다. “이치다 어워드 10회 연속 수상”, “최덕희 교수님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는 플래카드만 쓸쓸하게 펄럭이는 텅 빈 회식 장소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 영화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미포끝집 횟집이다.
미포 부근의 촬영 장면은 새롭게 추가된 분량으로, 기존에는 인천에서 촬영할 예정이었던 바닷가 장면을 부산에서 찍게 됐다. 쓸쓸하게 회식에 참석해 있던 덕희가 갑작스레 자신을 찾아온 세옥을 만나 함께 부둣가를 걷는 장면 또한 미포에서 촬영되었다. 해운대해수욕장 좌측 끝단에 있는 이 포구에서는 날씨가 좋을 때 마린시티의 스카이라인이 보이기도 하지만, 해당 장면을 촬영한 날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두 사람 뒤로 부산의 스카이라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산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을 강조하고 싶었던 연출팀은 CG를 활용해 스카이라인을 등장시켜 해운대의 실제 분위기를 구현했다.
부산, 글로벌 OTT 촬영의 허브가 되길
최근 드라마 스태프 규모가 적게는 60~70명에서 많게는 120명 정도에 달하고, 여러 장비가 이동해야 하는 로케이션 환경은 예산이나 여러 방면에서 품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자들이 부산으로 향하는 이유가 있다고 <하이퍼나이프>의 제작진은 입을 모아 말했다. 오종환 프로듀서는 “부산은 국제영화제를 개최하며 영화 도시로서 큰 발전을 이루었고, 국내 최초의 지역 영상위원회인 부산영상위원회에서 지원해주는 분들도 매우 꼼꼼하고 열정적”이라고 강조한다. <하이퍼나이프>부산 촬영 역시 부산영상위원회에서 먼저 ‘부산 로케이션 인센티브 지원’ 사업을 제안해준 덕분에 성사될 수 있었다.
특히 OTT 작품은 일반적인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크레딧 노출이 어렵기 때문에 지원 사업의 요구 조건을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김한빛 프로듀서는 부산영상위원회와 디즈니+측이 부산 촬영을 현실화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유연하게 협의해준 덕분에 촬영이 가능했다는 비하인드를 전했다. 크레딧 부분에서 로고가 아닌 텍스트로 대체했고, 사업 지원부터 촬영 시작까지 2주도 채 안되는 시간 안에 이례적으로 많은 부분을 빠르게 협의해주었다. <하이퍼나이프>의 경우 지원 예산의 대부분이 부산 지역 내 숙박 업체들에 지급하는 숙박비에 사용되었지만, 이는 작품마다 상황에 맞춰 예산 가이드라인에 따라 현물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