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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3] 부산영상위원회 아카이브 총서 <부산의 장면들> #2, ‘부산, 시리즈’, 한진원 감독 인터뷰
이유채 사진 오계옥 2025-10-20

‘부산 그리고 한표의 계절’

- 2014년에 한 친구에게 이메일로 연재한 소설 <소라게>가 <러닝메이트>의 원안인 걸로 알고 있다.

여러 가지 포인트가 맞물려 시작된 이야기다. 연출부를 그만두고 다시 뭘 써볼까 작정하고 고민하던 시기에 1인칭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경도되어 있었다.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버리게 해준 드라마 <미생>을 보면서 어떤 세계관 속에서 부딪히고 성장해나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았다. 여기에 학생회장 선거에 관한 실제 기억까지 붙으면서 이야기가 점차 꼴을 갖췄다. 일인자가 1등 하는 이야기에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인지라 이인자가 주인공인 <러닝메이트>를 만들었다. 아무리 봐도 주인공감이 아닌 세훈이 어떻게 선거의 중심에 서게 되는지를 비롯해 다양한 캐릭터를 살려줄 세계관 설명이 총 9부작 중 3부까지 이어진다. 신선하고 젊은 배우들, 내 또래의 80년생들로 꾸린 키 스태프들과 비만 안 오면 뭐든 찍을 수 있다는 열정으로 만든 내 첫 연출작을 잊지 못할 것 같다.

- 세훈 역의 윤현수, 상현 역의 이정식 등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 젊은 배우들에게서 어떤 매력을 발견하고 캐스팅했는지 궁금하다.

윤현수 배우는 첫 만남에 ‘이 친구가 세훈이구나’ 하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막연히 떠올렸던 세훈의 얼굴과 말투를 다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오자마자 화장실 먼저 가겠다면서 어딘가 허술한 모습을 보이는 것까지 세훈 그 자체였다. 함께 작업하면서 <미생>에서 임시완 배우를 발견했을 때만큼의 충격을 윤현수 배우에게 받았다. 이정식 배우는 데뷔한 지는 꽤 됐으나 아직 대중적으로 덜 알려진 보석 같은 친구다. 보통 오디션에서 신인들은 폭발시키고 자신을 드러내는 연기를 하기 마련인데 이정식 배우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풀어냈고 그 와중에 연기력이 너무나도 안정적이었다. 서늘한 면과 아주 나이스한 면을 동시에 가졌는데 그 점이 상현에게도 있어 잘 어울렸다. 세훈과 상현이 상반된 느낌이었으면 했는데 윤현수 배우가 본능적이고 상큼 발랄한 매력이 있다면 이정식 배우는 진중하고 무거운 매력이 있어 흡족하다. 촬영 다 끝나고 이정식 배우에게 이런 말을 건넨 적 있다. “앞으로 네가 어떤 배우인지는 <러닝메이트> 하나로 다 설명될 거다.”

- 3화 ‘스타 탄생’까지는 주인공 세훈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세훈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가 주변 인물들에게 느끼는 감정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선거 드라마임에도 초반부를 한 사람에게 집중해 구성한 이유는 무엇인가.

<소라게>를 쓸 때부터 이 이야기는 세훈의 1인칭 시점으로 풀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작품의 방향성과도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게 나와 제작 구성원들의 판단이었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객관적인 시선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결국 각자의 주관적 감각과 해석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러닝메이트>는 이런 생각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섣불리 객관화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한 사람의 불완전한 시야와 그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 함께 포착하고 싶었다. 어리숙한 주인공이 자기 세계를 해석하고 반응하는 리듬 자체가 드라마의 구조이자 톤이기도 했다.

- 세훈이 원대에게서 상현의 러닝메이트가 되는 계기가 중요해 보인다. 자신이 원대의 열두 번째쯤 전교 부회장 후보였다는 걸 안 세훈은 원대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고 상현의 손을 잡는다. 왜 이 사실이 세훈에게 그토록 분노를 일으킨 걸까,

‘발기남 사건’으로 자존감이 마이너스 20점까지 내려갔던 세훈은 원대의 러닝메이트 제안으로 50점까지 회복한다. 이미 인정욕구가 극도로 커진 상태에서 자신이 원대에게 대체 가능한 존재였다는 걸 알자 더 큰 공허함을 느낀다. 그 거대한 허기를 상현이 채워주려고 하니 그에게 마음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세훈은 겉으로는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사실 내면에선 끊임없이 올라가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던 셈이다.

- 양원대 캠프와 곽상현 캠프, 양 진영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어느 한쪽이 대단히 정의롭거나 저열하지 않아서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 정치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다. 양쪽의 성격을 구축하는 과정은 어떠했나.

양원대 캠프는 협력과 단합을 중시하는 집단으로 설정했다. 그래서 원대가 소속된 동아리도 합창부다. 원대는 전면에 나서 캠프를 이끌고 문제를 해결하는 전통적이고 강한 리더십의 소유자다. 반면 곽상현 캠프는 개성과 자유를 중시한다. 상현은 직접 나서기보다는 주변 인물들의 특기를 활용해 목표를 달성하는 지능형 리더에 가깝다. 두 리더십의 차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공간, 조명, 활동 시간대 같은 요소도 세심하게 구분했다. 예컨대 양원대 캠프는 햇빛이 잘 드는 음악실처럼 개방된 장소에서 모이지만 곽상현 캠프는 연극부실 같은 어둡고 폐쇄적 공간을 베이스캠프로 삼는다. 원대는 한낮에 햇살 가득한 레스토랑에서 세훈에게 러닝메이트를 제안하는 반면 상현이 세훈을 처음 만나는 시점은 저녁 시간의 편의점이다. 이런 차이는 배우 캐스팅 과정에서도 중요하게 고려했다. 두 인물을 모두 포식자라고 했을 때 원대는 정면 돌파하는 육식동물이고 상현은 은근하고 미끄럽게 파고드는 뱀의 이미지였다.

- 다시 1화 ‘낭중지추’로 돌아가자면 세훈은 “학교는 비정한 현실 세계의 축소판이다.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각자의 역할과 파벌이 정확하게 나눠져 있다”라고 말한다. 감독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한 정의일까.

내 학창 시절은 그리 비정하지도 특별히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지도 않았다. 난 친구들과 두루두루 지내면서 싸우기도 하고 가끔 학원 가는 척하며 놀기도 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작품과 창작자의 개인사가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묻는 거라면 그 연결고리는 매우 약하다.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지 몇년 됐고 작품과 나 사이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극 중 학교는 현실 고등학교를 재현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은유이고 설정일 뿐이다. 이 정글 안에서 누가 일인자인가를 겨루는 자존심 싸움, 권력 다툼에 초점을 맞췄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겨야 하는 이유보다 지면 안되는 이유가 더 커진다. 그리고 ‘지면 정말 큰일 난다’까지 가는데 작가적 관점에서 본 현실 정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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