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아직 투표 도장을 찍던 감각이 남아 있는 대한민국에 학교 선거 이야기가 찾아왔다. 2025년 6월 전편 공개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러닝메이트>는 학생회장 선거를 앞둔 영진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인기와 자본력을 겸비한 1번 곽상현 후보(이정식), 현직 전교 부회장으로서 탄탄한 입지를 다진 2번 양원대 후보(최우성). 두 후보가 원하는 건 단지 소중한 한표만이 아니다. 바로 1학년 노세훈(윤현수)이다. 눈에 띄지 않는 모범생이었으나 추문으로 전교생이 다 아는 비운의 스타가 된 세훈은 회장 후보들의 관심과 감투의 힘으로 명예 회복을 노린다. 연출은 <기생충>의 공동 각본가인 한진원 감독이 맡았으며 이 작품은 그의 첫 연출작이다. 촬영지 섭외는 이 시리즈의 또 다른 선거전이었다. 주무대가 될 학교를 찾기 위해 제작진은 부산으로 향했다. 옛 가락중학교, 부산해사고등학교 등을 오가며 교실과 복도, 유세가 열리는 야외 교정까지 드라마의 배경을 채워갔다. 부산의 과거와 현재를 품은 학교들을 영상으로 담아낸 것만으로도 기록적인 의미가 있다. 한진원 감독을 만나 시리즈 못지않게 속도감 넘치는 대화를 나눴다. 자신감과 좌절, 흥분과 재미의 롤러코스터였던 제작 과정을 이야기하는 그에게서 극 중 열성적으로 선거를 치르는 영진고 학생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정희(홍화연)가 이토록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오늘이 달라진 모습을 친구들에게 처음 보여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늘 안경을 쓰고 머리를 질끈 묶고 다니던 모범생이 세련된 모습으로 유세장에 나타나자 주변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학교물을 촬영할 때는 언제나 시간과의 싸움이다. 정규 수업 중에는 촬영이 불가능하니 방학 기간을 이용해 압축적으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그럼에도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할 수 있었던 건 주말에 학교 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모두 부산영상위원회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이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송준 프로듀서) 빠듯한 일정 탓에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부산 나들이를 즐길 여유는 없었지만 제작진 모두는 부산 바다를 가슴 가득 품고 돌아올 수 있었다. 숙소 창 너머로 펼쳐진 오션뷰 덕분이었다. “창밖 너머로 드넓은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다.”(한진원 감독) 바다와 학교, 그리고 청춘의 순간이 교차하던 부산 촬영. 그 묘미는 화면 너머에서도 그대로 전해질 것이다.
“저희 기호 1번과 함께해주신다면 내년부터 교내에 빽다방 영진고점을 유치할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선거를 5일 앞둔 두 번째 유세 날, 1번 곽상현 후보가 강력히 내세운 핵심 공약은 교내 카페 유치였다. 야외 유세 장면의 촬영에서 가장 큰 변수는 언제나 날씨였다. ‘곧 갤 것’이라는 예보에 기대어 끝까지 기다리거나, 때로는 과감히 철수하는 날의 반복. 그렇다면 이 장면을 찍은 날의 상황은 어땠을까. “사진을 자세히 보면 바닥이 살짝 젖어 있다. (웃음) 촬영 도중에 비가 내렸는데, 과감히 대기를 선택했다. 응원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는지 이날 티빙에서 커피차를 보내주셨다. 모두가 커피를 마시면서 어서 해가 나길 바랐다. 염원이 통한 걸까. 이내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고, 악천후를 뚫고 촬영을 재개할 수 있었다.”(한진원 감독) 1번의 베이스캠프는 부산민주공원에 꾸려졌다. 극 중 캠프단이 모이는 연극부실은 공원 내부에 있는 소극장을 활용했다.
2번 양원대 후보 캠프도 물러설 수 없었다. 양원대의 러닝메이트로 나선 박지훈(이봉준)은 등굣길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한표를 호소한다. 뛰어난 쇼맨십을 지닌 지훈은 수학여행 부활을 공약으로 내건 선거송으로 일찌감치 친구들의 관심을 끌었다. 정문에서의 첫 유세에 이어, 후문에서 펼쳐진 두 번째 유세 장면은 더욱 역동적인 분위기를 의도했다. “그래서 학생 보조출연자도 최대한 많이 투입했다. 현장이 북적이고, 혈기왕성한 친구들의 열기가 더해질수록 소음 관리에 특히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촬영 전 단체 응원가 연습 때는 연습실에서 쫓겨나기를 반복한 터라 이번에는 인근 주민 분들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소란스러웠을 텐데 너그러이 참아주신 부산해사고등학교 인근 주민 분들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좋겠다.”(한진원 감독)
영정 사진부터 X표가 그려진 마스크까지.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선거일을 이틀 앞둔 세 번째 유세 날, 전날 밤 양원대 후보의 선거용 등신대가 다량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캠프는 ‘민주주의의 죽음’을 알리는 추모와 침묵의 유세 퍼포먼스로 대응한다. 캠프단, 합창부, 방송부, 일반 학생들까지. 보조출연이 다수 필요한 작품이었기에 제작진은 전략적으로 부산을 촬영지로 선택했다. “영화 촬영 경험이 많고 인프라가 잘 갖춰진 도시라 인원 수급이 용이할 거라 판단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우리처럼 다인원이 필요한 드라마든, 시대물이든 신경 써야 할 요소가 많은 작품의 프로듀서라면 공감할 거다. 부산을 우선순위로 고려하는 이유를.”(송준 프로듀서) “무엇보다 부산에서 촬영한다고 하면 배우든 스태프든 다들 반긴다. 숙소 생활과 촬영이 편리하면서도 틈틈이 힐링할 수 있는 도시니까.”(한진원 감독)
결국 몸싸움으로 번졌지만 웃고 있는 학생들의 얼굴만 봐도 현장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배우들이 직접 만든 선거송을 촬영 전 함께 녹음하고 안무 연습을 하며 이미 충분히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촬영이 후반으로 갈수록 연기인지 실제인지 모를 정도로 몰입하는 배우들도 있었다. “우리 팀이 꼭 이겨야 한다”라는 마음으로 모두가 점점 더 진지해졌다고. 해사고는 일반적인 학교들과는 다른 독특한 구조 덕분에 제작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넓은 야외뿐만 아니라, 건물과 건물을 잇는 구름다리, 곳곳에 숨겨진 분리수거장 등 흥미로운 공간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학교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도 다양한 동선과 구도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공간적 특수성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다.”(한진원 감독) 옛 가락중학교에서도 촬영했는데 주로 교실과 복도 장면이었다.
“Only one, only you. 나를 위한 최고의 선택, 기호 1번 곽상현!” “영진고의 자랑, 양원대가 왔다! 기호 2번 양원대!” 파란색 유니폼을 맞춰 입은 양원대 캠프쪽에서 터져나오는 엄지 아래 제스처와 야유 섞인 표정들. 양원대 캠프가 교내 우산 대여소 설치와 우천 시 샌들 착용 가능이라는 공약을 기습 퍼포먼스로 선보이며 여론몰이를 하자 양 캠프는 일촉즉발의 긴장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 장면은 마치 경기 직전의 링 위, 댄스 예능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배틀 무대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연출하고자 했다. 마침 해사고에는 무대처럼 구성된 이상적인 공간이 있어 이곳을 촬영지로 점찍어두고 있었다. 현장의 열기와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근접촬영을 중심으로 장면을 구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