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승 감독은 모두가 인정하는 미쟝센영화제 20년 역사의 산증인이다.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 후배 감독들이 주도하는 걸 지켜보는 위치에 선 그는 새롭게 단장한 영화제가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또한 걱정보다는 응원하는 마음과 기대가 더 앞선다는 그는 여전히 단편영화의 중요성, 그리고 관객과 만나는 장으로서 영화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년 전 영화제의 시작을 알렸던 그에게서 미쟝센영화제가 재도약해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 지난 20년간 이어온 영화제를 마무리한 뒤에 4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후배 감독들이 그 기치를 이어받았는데 다시 돌아온 미쟝센영화제를 바라보는 소감이 어떤가.
어떤 산업 분야든 무언가 필요성을 느끼는 건 쉬워도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건 어렵다. 하물며 사라진 걸 다시 시작한다는 건 더더욱. 대표로 나선 7명의 감독을 비롯해 여러 후배 감독들이 모인 것이 대단하다. 특히 섹션명을 한국영화 제목으로 바꾼 점이 놀랍다. 예전엔 아버지 세대 감독이라고 하면 으레 서양 감독들 이름부터 대곤 했는데 이젠 한국영화가 역사의 중심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 집행위원을 맡은 감독들이 여러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던데.
이 영화제가 지금껏 왜 사랑받아왔는지를 직접 경험해본 감독들이기 때문에 프로그램 면에서는 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보다는 겉으로 잘 보이지 않는 영화제 운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무엇보다 지속성을 갖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2~3회 정도 운영하다가 지치면 안되니 적어도 5년 이상은 지원해줄 곳을 찾는 게 중요했다.
- 미쟝센영화제는 지난 20여년간 신인감독의 등용문 같은 곳이었다. 반면에 이 영화제가 마치 상업영화 진출을 위한 발판이 되는 것에 대해선 경계도 했다.
첫 출범 당시 풀 네임이 ‘미쟝센단편영화제, 장르의 상상력展’이었다. 장르라는 건 당연하게도 상업성과 연결된다. 코미디영화라고 하면 이미 웃고 싶어서 찾아오니까. 하지만 장르는 관객의 욕구, 정서의 구분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투적으로 상업성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상상력을 강조했다. 단순히 웃기는 코미디 그 이상의 것을 만들려고 고민하자는 것, 장르적 작가주의 내지는 작가주의적 장르를 추구했던 거다. 그럼에도 외부에서 볼 땐 상업적인 장르의 속성을 그저 답습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거기에 더해 장르를 답습하지만 말고 그걸 넘어서는 데에도 방점을 찍으려고 했다. 우리가 20년 동안 웰메이드 단편영화만 양산하려 했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 기존의 영화제들은 대부분 장편영화 위주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여전히 단편영화가 주목받기 어려운 환경이다. 미쟝센영화제에서 주목받았던 감독들은 영화제를 통해서 대중이 만족할 만한,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의 접점을 찾는 과정을 스스로 배워나갔던 것일까.
단편영화는 배급이 안되니까 영화제에서의 상영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미쟝센은 매년 1천편 넘는 출품작 중에서 최소 60편, 많게는 100여편까지도 상영하려고 했다. 그렇게 영화제를 첫회 치르고 나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세미나가 열렸다. ‘독립 단편영화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주제의 세미나에 패널로 나갔는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공격을 받았다. 단편영화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이야기를 너무 공격적으로 많이 들었다. 그런데 왜 단편영화는 상업성을 띠면 안되는지 되레 의문이 들었다. 장편영화는 상업적이라면서 공격하지 않으니까. 나아가 상업적이라는 말이 적절한 지적인지도 의문이 들었다. 배급이 되어야 상업성을 띠는 것 아닌가. 왜 단편영화를 장르로 구분하느냐는 비판도 있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새로운 걸 하니까 저항도 생긴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 초창기에 영화제를 만들면서 두 가지 목표에 대해 언급한 적 있다. 신인감독의 발굴과 단편영화의 대중화. 목표를 충실히 이뤘다고 생각하는가.
시대가 긴 호흡의 영화나 드라마보다 짧은 길이의 영상을 빠르게 소비하는 시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프로페셔널한 창작자가 만드는 것과는 또 다른 영역이니까 직접 비교는 어렵다. 시대가 빠르고 짧게 바뀐다고 해서 갑자기 단편영화의 수요가 늘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시네마틱’한 무언가를 관객이나 시청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플랫폼은 많아진 것은 분명하다. 이런 변화한 시대상 속에서 제21회 영화제가 풀어가야 할 숙제다.
- 또한 영화제는 축제의 장으로서 극장이란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행사다. 미쟝센은 늘 공간의 경험을 중시했다.
다 함께 한곳에 모여서 영화의 흐름을 공유하며 본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영화제는 페스티벌이다. 영화라는 예술 작품을 중심으로 관객과 영화인이 모여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게 가장 큰 역할이다. 지금까지는 그런 기능을 잘 수행했다. 생각해보면 관객이 극장에 가기 위해 예매하고 채비하고 이동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행위 과정 자체가 퍼포먼스다. 인간은 퍼포먼스에 대한 니즈가 있기 때문에 극장이 사라질 일은 없다. 지금의 한국영화 위기론도 달리 생각해보면 이게 극장의 위기지 한국영화 자체의 위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 한국 극장은 포화상태다. 극장 수가 많아진다고 해서 상영하는 영화가 다양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봐왔다. 한국 영화산업에 있어서 그동안 극장의 위치가 너무 컸다.
- 빠르게 변화하는 관객 취향을 어떻게 사로잡을 것인지도 영화제가 풀어야 할 숙제다.
과거 부산국제영화제의 이벤트 중에 내가 제안해서 ‘시네마 투게더’라는 행사를 만들었다. 작가, 평론가, 감독이 관객과 함께 영화를 보는 거다. 이제는 영화도 중요하지만 영화를 둘러싼 콘텍스트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과거에 해외 영화제를 돌아다니다 보면 극장에서 영화를 엄숙하게 즐기는 것이 아니라 거의 공연 보듯 소통하면서 즐기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우리 역시 영화를 보다 자유롭게 즐기는 분위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 영화제의 명예집행위원장으로서 미쟝센영화제는 어떤 의미인가.
영화가 파일 형태로 존재하면 그건 그냥 정보다. 상영을 해야 비로소 영화가 된다. 단편영화를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줬다는 게 가장 큰 의미로 남는다. 이제 <씨네21>도 합류했으니, 상호 발전해나갔으면 좋겠다.